아고라
   
 
작성자 안형식목사
작성일 2008-08-31 (일) 20:57
ㆍ추천: 0  ㆍ조회: 2643      
IP: 61.xxx.15
아우그스불그 신앙고백서[전문]
아우그스불그 신앙고백서

차례

아우그스불그 신앙고백서가 나오기까지

(황제 칼 5세에게 바치는 글)

제1부  주요신조

제1조 하나님에 관하여
제2조 원죄에 관하여
제3조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제4조 의인에 관하여
제5조 교직에 관하여
제6조 새 복종에 관하여
제7조 교회에 관하여
제8조 교회란 무엇인가?
제9조 세례에 관하여
제10조 주님의 성만찬에 관하여
제11조 죄의 고백에 관하여
제12조 회개에 관하여
제13조 성례전의 사용에 관하여
제14조 교회의 직제에 관하여
제15조 교회의 관례에 관하여
제16조 공민 생활에 관하여
제17조 심판을 위하여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제18조 자유의지에 관하여
제19조 죄의 원인에 관하여
제20조 신앙과 선행에 관하여
제21조 성자숭배에 관하여

제2부 시정된 악폐를 설명한 조항

제22조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관하여
제23조 사제의 결혼에 관하여
제24조 미사에 관하여
제25조 죄의 고백에 관하여
제26조 음식물의 구별에 관하여
제27조 수도사의 서약에 관하여
제28조 교권에 관하여

맺음말

지원용 역, 컨콜디아사, 1965.6.25일 발행, <값 50원>

아우그스불그 신앙고백서가 나오기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칼 제5세는 1530년 4월에 독일 아우그스불그 시에서 제국의회를 열기 위하여 그해 봄(1월 20일)부터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의 적인 토이기인들에 대항하여 가질 군사행동과 행정에 있어서 연합전선을 펴고 또한 종교개혁의 결과로 국내에 초래된 종교적 분열 상태를 종결짓기 위하여 이런 모임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길 목적으로 황제는 제국 내의 여러 자유 도시의 제후공들과 대표들을 초청하여 모든 사람의 의견과 생각과 주장이 묵살되는 일이 없도록 종교적인 여러 가지 상이점에 관하여 논의함으로써 분열을 지양하고 연합을 이루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황제의 초청을 고려하여, 독일 색손주의 선제후는 그의 관할 지역 내의 교회의 신조와 종교행사 등에 관하여 평가를 하도록 윗텐벨그 대학의 신학자들에게 부탁하였다. 사실 1529년 여름(7월 26일~9월 14일)에 이미 슈바바흐 신조(Schwabach Articles)라고 알려진 교리해설문이 루터와 멜랑톤 등에 의해 준비되어 그해 10월에 제출된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소요되는 것은 그 후 색손 지방 내 교회 간에서 변경된 점들에 대한 추가 항목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런 추가 부분이 이 윗텔벨그 신학자들(루터, 멜랑톤, 요나스, 부겐하겐)에 의하여 준비되어 1530년 3월 27일에 톨가우 집회에서 색손 선제후 요한에게 제출되어 인준을 받게 되었다. 이것을 보통 톨가우 신조 (Torgau Articles)라고 부르는데, 그 원본이 1830년 바이말에서 발견되었다.

이상에서 언급한 슈바바흐 신조와 톨가우 신조, 말부르크 회의에서의 15개 조문을 기반으로 하여 장차 황제에게 제출할 수 있는 문서를 준비하되, 색손 지방뿐만 아니라 모든 루터교를 위한 공동신조가 될 수 있는 신앙고백 문을 작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앞서 로마 교회 신학자 요한 엑크의 “404 논제”라는 것이 공개되어 개혁자의 입장을 불리하게 만든 바 있었다.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이렇게 구상한 고백서 가운데에는 루터파 신도들을 다른 반 로마교파 사람들과 동일 시 하는 것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한편 로마 교회와의 상이점 보다는 유사점을 강조할 필요성이 있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여 가르치는 사람들의 반성에 대한 희망이 아직까지 적지 않았던 때인지라, 이 문서의 어조는 대체로 우호적이며 온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들이 필립 멜랑톤의 손에 의하여 준비될 신앙 고백서의 성격을 결정하는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아우그스불그 신앙고백서”는 그 내용상으로 보아, 슈바바흐 신조가 그 첫 부분의 골자가 되었고 톨가우 신조가 둘째 부분의 주요내용이 된 셈이다. 말틴 루터는 당시 파문을 받은 중이었으므로 의회에 나올 수 없었고, 코벌그에 머물러 있으면서 서신을 통하여 자문에 응하였던 것이다. 비록 루터 자신이 쓰지는 않았으나 신학적으로 보아 루터 자신의 입장을 잘 말하여 주는 글이다. 정밀을 기하는 고전학자 멜랑톤은 1530년 6월 25일 황제에게 이 신앙고백서를 정식으로 봉정하기 바로 직전까지 교정과 수정을 계속 가하였다. 일곱 명의 제후들과 두 자유 도시의 대표들에 의한 서명으로 비로소 이 고백서는 하나의 공적인 신앙고백서로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우그스불그 신앙고백서는 여러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 객관적인 보편성, 신앙에 의한 의인으로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의 강조, 자유의 소중성, 초대 기독교 정신의 계승 등을 말할 수 있다. 내용상으로 보아 결코 어떤 새 교리를 논한 것이 아니라, 지난 여러 세기를 거쳐 주님의 교회가 가르쳐 온 기독교 신앙의 중심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에 의한 의인의 가르침과 성서의 기본적 교의(敎義)를 재 강조했을 따름이다. 서문 외에 2부로 되어 있는데, 제1부(1~21)에는 복음주의 교회의 교리에 관한 주요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고 제2부(22~28조)에는 성례전, 사제의 결혼, 미사, 참회, 전통, 서약, 교권 등에 관한 중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점들에 관한 시정사항이 취급되어 있다. 이 신앙고백서처럼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입장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주는 글이 없는 줄 안다. 그러므로 이 고백서는 루터교 뿐만 아니라 많은 개신교 교파들에 의하여 한 결 같이 존중시 되어 오고 있다.

6월 25일 오후 신앙고백서를 낭독할 시간이 되었을 때, 선제후, 귀족, 제왕, 제후, 교직자, 자유시의 대표들 그리고 제국과 관계있는 수백 명의 청중이 실내외에 가득 차 있었다. 황제 칼 5세의 숙소로 지정된 대감독의 궁전 실내에 준비된 프렛폼에는 황제 칼 5세가 정좌하고, 좌우에는 색손공과 펄디난드 왕이 앉아 있었다. 요한 엑크도 동석하였다. 그리고 황제의 지시에 따라 곧 착석하였다. 라틴문과 독일문으로 된 신앙고백서가 각기 들어왔다. 황제는 라틴문의 낭독을 요구했으나, 색슨공은 “저희들은 지금 독일 영토 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독일문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요청하였다. 이청이 수락되어 독일문이 색손 지역 고문 크리스챤 베엘(Beyer) 박사에 의하여 낭독되었다. 전문 낭독에 두 시간이나 걸렸다. 황제, 왕공, 제후, 감독들 모두가 경청하였다. 제23조에 이르러 마인쯔 감독에 대한 언급이 있었을 때 펄디난드 왕은 마인쯔 감독에게 “사실인가?” 라고 따졌다 한다.

낭독이 끝난 후 두 개의 고백서의 원본이 궁정 비서관에게 전하여졌고, 곧 이어 마인쯔 선제후에게 전하여졌다가 황제에게 봉정되었는데, 그는 독일문을 마인쯔 선제후에게 돌려주고 라틴문은 황제 자신이 지참하여 브러셀 황실 문고에 두었다 한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두 개의 원본은 모두 분실되어 현재 찾을 길이 전혀 없는 것 같이 보인다. 비록 원본들은 분실되었으나, 멜랑톤은 이듬해 5월 친히 라틴문의 믿을만한 사본과 자기의 독일문 원고를 합하여 “변증서”와 같이 윗텐벨그에서 출판하였다. 이것이 곧 1531년 표준판(editio princeps)이다. 그리고 1530년대에 나온 것 중에서도 50개 이상이나 발견되었으며, 그 가운데에서는 6월 25일 전까지 준비하는 동안에 사용된 여러 단계의 것으로 여겨지는 문헌들과 또한 6월 25일 이후에 변경된 부분이나 용어가 포함된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그 후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독일말과 라틴말 판이 모두 정밀히 연구되어 애당초 황제에게 봉정한 것과 거의 똑같은 본문을 내놓게 되었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한국어판을 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신앙고백서를 통하여 개혁자 루터의 정신에 다시 한 번 접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 역서의 본문으로는 Concordia Triglotta(1921)에 취급된 라틴문 및 영문판, T.G Tappert의 편역인 The Book of Concord에 포함된 본문을 사용하였고, Die Be kenntnisschriften der evanglisch-lutherischen Kirche (Goettingen, 1952)도 참고하였다. 이 해설문을 위한 보충이 필요할 경우 이상의 문헌 ⅩⅤ~ⅩⅩⅠ 를 참고하기 바란다.

옮긴이

지원용 역| 컨콜디아사| 1900.01.01 | 88p | ISBN : 2001589120




   
황제 칼 제5세에게 바치는 글

(1530년 아우그스불그 제국 의회에서 군주들과 여러 시 대표들이 황제 칼 제5세에게 바친 글)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사오며”(시 119:46)

가장 존엄하시고 지극히 강력하시며 비길 데 없이 위대하시며 가장 인자하신 주 황제이시여!

폐하께서는 기독교의 이름과 종교에 대하여 매우 잔악하며 세습적인 옛 원수 코이기인에 대항하여 강력하고 튼튼한 군비로 그의 횡포와 공격에 충분히 대항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의논시하고, 저희들의 거룩한 신앙과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각파의 의견과 판단을 서로 들으시며, 저희 가운데에서 피차 사랑과 관용과 친절을 가지고 이해하시며 고려하심으로써 상대편의 기록들 가운데 달리 취급되고 달리 이해되어 온 것들을 제거하시고 수정하시어 이러한 문제들이 단일한 진리와 기독교적인 일치에 이르도록 노력하시며, 저희들로 하여금 장래를 위하여 하나의 순결하고 진실한 종교를 가지고 보존하게 하시며, 저희가 다 한 그리스도 밑에 있으며 한 그리스도 밑에서(대적자 들과) 싸우고 있는 것처럼 역시 하나의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일치 단합하여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이런 종교 문제들에 관련된 분쟁에 대하여 피차 논의를 하게 하시려고 아우그스불그에 제국 의회를 소집하신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여기에 서명을 한 선제후며 군주들인 저희는 저희들과 관계된 여러 사람들과 또한 그밖에 다른 선제후들과 군주들과 의원들과 더불어 위에서 말한 의회에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폐하의 칙령에 응하여 지체 없이 아우그스불그에 왔습니다. 그리고 자랑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옵니다만 저희는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들입니다. (황제보다 먼저 도착하였음)

아울러 폐하께서는 아우그스불그에서 의회 벽두, 특별히 제국의 여러 의원들로 하여금 칙령에 의거하여 그들의 의견과 판단을 독일말과 라틴말로 써서 제출하도록 제국의 선제후들과 군주들과 다른 의원들에게 제의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 다음 수요일 적절한 검토가 있은 후 오는 금요일에(최후 순간에 토요일, 6월 25일로 변경됨) 신앙고백의 조문을 제출하겠다고 하였던 것이므로 폐하의 원하심에 따라 저희 목사들과 설교자들과 저희는 자신들의 이러한 종교 문제에 관한 신앙고백을 봉정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저희들은 성서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근거한 교리를 이제까지 저희 나라와 공령(公領)과 영토와 여러 시와 교회 내에서 반포하고 가르치고 수락하여 왔음을 분명히 밝히는 바입니다.

그리고 만일 제국의 다른 선제후들과 군주들과 의원들 가운데에서 폐하의 제의에 따라 역시 저희의 것과 비슷한 문서를 라틴말과 독일말로 제출하여 이러한 종교 문제에 대하여 그들의 의견을 진술한다면, 저희는 그들과 그들의 동료들과 더불어 저희의 가장 인자한 군주이신 폐하 앞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에 따라 경의를 가지고 협의하고 화합하여 저희 양파간의 문제를 무례한 논쟁 없이 평화적으로 논의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분쟁을 없이 함으로써 참되고 일치된 한 종교에 돌아가게 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저희 모두가 다 한 그리스도 밑에 있으며 같은 그리스도 밑에서 (원수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처럼, 폐하의 칙령의 취지에 따라 한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하며 또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진리대로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희가 열렬히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른 선제후들과 군주들과 영주들에 관하여 말씀드린다면, 그들은 폐하께서 현명하게 생각하신 방법 즉 서로 문서를 제출하여 피차 침착하게 협의함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고안하신 방법에 따라 이러한 종교 문제를 취급해서는 아무런 진전도 볼 수 없고 또한 아무런 결과도 가져 올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기독교적인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일이라면-하나님과 선한 양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명확한 증거를 남겨 놓는 바입니다. 그리고 폐하와 제국의 다른 선제후들과 영주들과 종교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열정에 감동받은 모든 사람들과 또한 이 문제에 관하여 어느 한편에 치우침이 없이 공평무사하게 들어 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저희와 저희 동료들과 더불어 이 신앙고백서에서 이런 것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 친절하시게도 한 번만이 아니고 여러 번 제국의 선제후들과 제후들과 군주들에게 예고하시고 또한 1526년에 열린 스파이어 의회에서 소정의 유시와 훈련의 양식에 따라 낭독하게 하시고 공적으로 선언하게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이런 종교 문제를 취급하실 때, 폐하의 어명으로 된 어떤 이유 때문에 무엇이나 결정하시는 것을 좋게 여기시지 않으시며 또한 무엇이나 결론지을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로마 교황과 함께 총회를 소집하시기 위하여 폐하의 직권을 기꺼이 사용하시겠다고 하신 줄 압니다. 이리하여 그 문제는 일 년 전에 스파이어에서 모였던 의회에서 일층 더 세밀히 공포되었습니다. 거기에서 폐하께서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이고 저희의 친구이며 인자한 군주이신 펄디난드 전하와 같이 폐하의 대변자와 사무관을 통하여 특별히 다음의 사항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곧 폐하께서 의회 소집에 있어서 제국 안에 있는 폐하의 대표자, 총재, 황실 고문관 및 라티스본(Ratisbon, 1527)에서 소집된 다른 대의원들의 결의를 아시고 깊이 숙고하셨다는 점과, 그리고 폐하께서도 의회를 소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셨다는 것과, 또한 폐하와 로마 교황 사이에 조정되어야 할 문제들이 거의 합의를 보았다는 점들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화해의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폐하께서 로마 교황으로 하여금 총회를 개최하도록 하실 수 있으리라는 점을 의심치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로마 교황으로 하여금 교서를 가급적 빨리 발표하게 하심으로써 교황이 폐하와 더불어 이런 총회 소집에 대하여 동의하셨다는 점을 확증하도록 힘쓰시겠다고 시사한 것이 됩니다.

그리므로 종교 문제에 있어서 저희와 다른 파 사이의 분쟁이 우의적으로 사랑 가운데서 해결되지 않는다면, 저희는 이러한 보편적이며 자유로운 기독교 회의를 계기로 하여 폐하 앞에 나아가 이미 행한 것 이외의 주장까지도 밝히고 변호하리라는 것을 삼가 제의하는 바입니다. 회의 소집에 관해서는 폐하께서 통치하시는 동안에 열린 모든 제국 의회에서 제국의 선제후들과 제후들과 다른 영주들 편에서 일치된 행동과 표결이 이미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정당한 수속을 이미 밟아 가지고 무엇보다도 중대한 이 문제에 대하여 저희의 입장을 오는 의회와 폐하께 제시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폐하와 의회에 대한 이 입장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습니다. 만일 저희와 다른 파 사이의 문제가 최근의 칙령에 따라 우의적으로 사랑 가운데서 해결되고 완화되며 기독교적인 일치에 이르게 된다면 별문제이겠지만, 현재로서는 이 문서나 어떤 다른 문서에 의해서도 이 공소를 포기하지 않겠사오며 또한 저희로서는 포기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이런 입장과 견해에 대하여 여기서도 엄숙히 공적으로 증언하는 바입니다. 이하에 조목조목 들어서 기술한 글은 저희와 저희 동료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제1부 주요신조

제 1조 하나님에 관하여

우리 교회는 일치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본질의 통일과 세 위에 관하여 니케야 회의에서 정한 법령(니케야 신조)은 참된 것임으로 의심 없이 믿어야 합니다. 즉 영원하시며 형체가 없으시고 분리되지 않으시고, 무한한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을 가지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자와 보존자이신 하나님의 유일한 신적 본질이 존재합니다. 그러면서도, 같은 본질과 능력을 가지시고, 아울러 함께 영원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세 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부들이 사용해온 “위”(位)란 말을 우리 교회가 사용하는데 이것은 다른 어떤 것에 있는 한 부분이나 한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자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하나님에 관한 신앙) 조항에 반대하여 일어나는 모든 이단들을 정죄합니다. 곧 선악의 두 원리를 주장한 마니교파(Manichaeans)가 그러하며, 또한 발렌틴파(Valentinians), 아리우스파(Arians), 유노미어스파(Eunomians), 모하멧파(Mohammedans) 그리고 모든 이러한 유의 이단들이 그러합니다. 우리 교회는 신구 사모사타파(Samosatenes)도 정죄합니다. 그들은 다만 한 위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교활하고 불경스럽게 말씀과 성령은 별개의 위가 아니라, “말씀”은 이야기된 말(verbum vocale)이며, “성령”은 피조물 가운데 있는 활동(motus)을 의미한다고 논증합니다.

제2조 원죄에 관하여

우리 교회는 또한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아담(처음사람)이 타락한 이래 자연적인 방법으로 출생한 모든 인간은 다 죄를 지니고 태어납니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신뢰하지 않으며, 정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질병이나 혹은 생래의 악은 참으로 죄인데, 세례와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이 죄가 오늘날도 정죄하며, 그들에게 영원한 죽음을 가져오게 합니다.

우리 교회는 펠라기어스파(Pelagians)와 다른 파들도 정죄합니다. 그들은 생래의 악이 죄라는 것을 부인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공적과 은혜의 영광을 애매하게 만듦과 아울러 인간이 자기의 힘과 이성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제3조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우리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말씀” 곧 하나님의 아들은 축복받은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어 한 위 안에 분리할 수 없게 결합된 두 본성인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는데, 이 한 분 그리스도께서는 참 신이시고 참 인간이십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을 화해시키시고, 원죄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모든 실제적인 죄로 인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시기 위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장사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또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삼일 만에 확실히 부활하셨습니다. 그 후에 그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셔서 영원히 통치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주관하시며, 그를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믿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들을 통치하시고 위안하시고 살리며 악마와 죄의 힘에 대항하여 그들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사도 신조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대로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제4조 의인에 관하여

우리 교회는 의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인간은 그 자신의 힘이나 공적이나 업적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없으며, 다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서 이루어질 수 있고, 죽음으로 친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들의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그 신앙으로 값없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앙을 그의 앞에서 의로 인정하십니다. (롬 3장, 4장)

제5조 교직에 관하여

우리가 이 신앙을 얻게 하기 위하여 복음을 가르치고 성례전을 집행하는 교직이 제정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방편으로서의 기구를 통하여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장서와 시간 가운데 임하시게 되며, 복음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앙을 일으키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공적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의 은총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재세례파와 그와 비슷한 다른 파들을 정죄합니다. 그들은 성령이 외적인 말씀 없이 인간 자신의 준비와 업적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제6조 새 복종에 관하여

우리 교회는 또한 이렇게 가르칩니다. 이 신앙은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며 또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선을 행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결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용서와 의인이 신앙에 의하여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하라” (눅 17:10)고 그리스도 자신이 증거하신 바와 같습니다.

고대 교회의 교부들도 역시 같은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공적 없이 신앙만으로 값없이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라고 암브로스(Ambrose)는 말합니다.

제7조 교회에 관하여

교회에 관하여 우리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유일하고 거룩한 교회는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복음을 순수하게 가르치며 성례전을 올바로 집행하는 성도의 회중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참된 통일을 위해서는 복음의 가르침과 성례전의 집행에 관하여 일치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인간의 전통 곧 인간에 의하여 제정된 의식과 예식이 어디서나 같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엡 5장, 5장, 6장)고 사도바울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제8조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원래 성도들과 참된 신자들의 회중이기는 하지만, 현생에 있어서는 많은 위선자들과 악한 사람들이 신자들 가운데 섞여 있게 되므로 악한 사람이 집행하는 성례전을 받는 것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 23:2)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대로입니다. 성례전과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악한 사람들에 의하여 주어진다 할지라도 효과는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것이므로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의 값어치에 따라 효과가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도나투스파(Donatists)와 이러한 유의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악한 사람들의 교직을 허용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악한 사람들의 교직은 무익하고 이들이 행한 성례는 전혀 무효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9조 세례에 대하여  

우리 교회는 세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세례는 구원을 위하여 필요하며,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바쳐진 아이들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유아 세례를 거부하고 유아들은 세례 없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재세례파 사람들을 배격합니다.

제10조 주님의 성만찬에 관하여

우리 교회는 성만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참으로 임재하며 성만찬을 받는 사람들에게 분배된다고 가르칩니다. 아울러 우리 교회는 이와 달리 가르치는 사람들의 주장을 거부합니다.

제11조 죄의 고백에 관하여

우리 교회는 죄의 고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고백할 때에 모든 죄를 낱낱이 열거할 필요는 없으나 개인적인 사면(absolutio privata)은 교회에서 주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시 19:12)라고 시편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모든 죄를 열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12조 회개에 관하여  

우리 교회는 회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세례를 받은 후에 타락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그들이 회심할 때 죄의 용서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와 같이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사면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는 원래 다음의 두 가지 부분으로 성립됩니다. 하나는 통회인데, 죄를 알게 되어 양심에 찔림을 느끼는 공포이며, 다른 하나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복음이나 죄의 사면에서 유래하며,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 사함 받는 것을 믿고 양심을 위로하며 공포로부터 양심을 해방시킵니다. 이리하여 회개의 열매인 선행이 반드시 따라 오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한 번 의롭게 된 사람이 성령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재세례파를 배격하며, 아울러 어떤 부류의 사람은 이생에서 죄를 범할 수 없을 만치 아주 완전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배격합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후에 타락한 사람들이 비록 회개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사면하지 않는다고 하는 노바티어스파(Novatians)도 정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의 용서가 신앙을 통하여 주어진다고 가르치지 않고 각자의 공로를 통하여 은총을 얻으라고 명령하는 사람들의 가르침도 거부합니다.

제13조 성례전의 사용에 관하여

성례전의 사용에 관한 우리 교회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례전은 사람들 가운데서 단순히 신앙고백의 표시가 되게 할 뿐만 아니라, 특히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표시와 증거가 괴게 하기 위하여 제정되었으며, 또한 성례전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일깨우고 굳게 하기 위하여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전을 통하여 주어지고 선언되는 약속을 믿을 수 있는 신앙이 더해지도록 역시 성례전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성례전이 그의 외적인 행위 (ex opere operato)로써 의롭게 한다고 가르치며 성례전을 사용할 때 죄의 용서를 믿는 신앙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지 않는 사람들을 배격합니다.

제14조 교회의 직제에 관하여  
   
우리 교회는 누구나 정식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교회에서 공적으로 가르치거나 성례전을 집행하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제15조 교회의 관례에 관하여

우리 교회는 교회 내의 관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특별한 성일과 축일 같은 것은 죄와는 관계없이 지킬 수 있으며, 또한 교회 내의 평화와 좋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유익한 것은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것들을 지키는 것이 마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처럼 여겨져 양심을 억압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달래며 그의 은총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고 또한 죄를 보상하기 위하여 제정된 인간의 전통은 모두 복음과 신앙의 교리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역시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은총을 자력으로 얻어 보려고 하는 것이나, 죄를 보상하기 위하여 제정된 식물이나 특정일 같은 것에 관한 서약과 전통은 무용하며 복음에 배치되는 것입니다.

제16조 공민 생활에 관하여

공민 생활에 관한 우리 교회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공민 생활에 대한 합법적인 규정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업적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챤이 공직을 가지고 재판장이 되거나, 국법이나 다른 형행 법령에 따라 사건을 판결하고 정당한 벌을 주고, 정당한 전쟁에 종사하고, 군인으로 봉사하고, 법적인 계약을 체결하고, 재산을 소유하고, 재판관이 요구할 때 서약을 하고, 결혼을 하고, 또한 자녀들을 혼인하게 하는 일 등은 모두 정당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크리스챤에게 이러한 공직을 금하는 재세례파를 배격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역시 복음의 완성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신앙에 두지 않고 공민의 의무를 저버리는 데 두는 사람들도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마음의 영원한 의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국가나 가정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제도로써 보완하며, 이런 제도 안에서 사랑을 실천할 것을 매우 강력히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은 죄를 범하도록 강요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그들의 위정자와 법률에 복종하여야 합니다. 물론 죄를 범하도록 강요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사람보다 하나님에게 복종하여야 할 것입니다.(행 5:29)

제17조 심판을 위하여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우리 교회는 또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 날에 심판하시기 위하여 나타나셔서 모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경건하고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주실 것이지만, 불경건한 자들과 악마들에게는 끝없는 고뇌를 받도록 정죄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정죄 받은  자들과 악마에 대한 징벌에 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재세례파 사람들을 배격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죽은 자들이 부활하기 전에 경건한 자들이 세상 나라를 점유하고, 불경건한 자들은 어디서나 억압을 당하리라고 하는 유대교적인 견해를 유포시키는 사람들도 역시 정죄합니다.

제18조 자유의지에 관하여

자유의지에 관한 우리 교회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사회 정의를 선택하고,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일들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어느 정도 가졌다고 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성령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의 곧 영적 의를 행할 능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고전 2:14) 오히려 이러한 의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을 받을 때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어거스틴은 그의“Hypognosticon" 제 3권 가운데에서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성의 판단 기능인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하나님 없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에 관계된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혹은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선한 것이나 이생에 관계된 일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선에서 나오는 것들, 곧 들에서 일하거나 먹고 마시거나 친구를 사귀거나 의복을 마련하거나 집을 짓거나 결혼을 하거나 가축을 기르거나 여러 가지 유용한 기술을 습득하거나 또는 이생에 관계된 모든 선한 것을 바라는 것들을 나는 “선하다”고 부른다. 이런 것들 중에서 하나님의 섭리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실로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님을 통하여 존재하며 시작된다. 우상을 숭배하거나 살인을 하려고 하는 것 등의 일들은 “악하다”고 나는 부른다.”

우리 교회는 펠라기어스파 및 그와 유사한 파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그들은 성령 없이 자연적인 능력만 가지고 하나님을 무엇보다 더 극진히 사랑할 수 있고, 또한 “행위의 본질”에 미칠 수 있는 정도까지 하나님의 계명을 행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비록 인간의 본성이 어느 정도 외적인 일은 할 수 있으나 -그 본성이 강도질이나 살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 신뢰, 사랑, 인내 같은 내적인 행동은 행할 수 없습니다.

제19조 죄의 원인에 관하여

죄의 원인에 관하여 우리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지만, 죄의 원인은 악한 자 곧 악마와 불경건한 자들에 의하여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악인의 의지는 하나님을 배척하게 됩니다.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라고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8장 44절에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제20조 신앙과 선행에 관하여

우리의 교사들이 선행을 금한다고 그릇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십계명에 관하여 발표된 문서들과 그와 비슷한 취지 밑에서 되어 진 다른 문서들에 의한다면 우리 교사들은 생활의 모든 형태와 의무에 관계된 갖가지 직책에 있어서 어떤 생활과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매우 유효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에 관하여 과거 설교자들은 많이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유치하고 불필요한 행위 곧 특별한 성일, 특정한 금식규례, 형제단, 성지순례, 성자숭배, 염주의 사용, 수도 생활 등과 같은 행위밖에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대적자들은 지금까지 이런 것들에 대하여 경고를 받아왔기 때문에 지금은 그런 것을 배우려 하지 않으며 이전 같이 그런 불필요한 행위를 설교하지도 않습니다. 이 밖에도 그들은 이제까지 전적으로 침묵을 지켜온 신앙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행위만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그들이 가르치기는 하지만 아직도 신앙과 행위를 결합시키며 또한 신앙과 행위로써 의롭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전의 것들보다는 퍽 나은 편이며, 그들의 옛 교리에 비하여 다소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주요한 교리가 되어야 할 신앙에 관한 가르침이 신앙의 의에 관한 설교 가운데서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을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오직 행위의 교리만이 교회 안에서 취급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사들은 신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교회에서 가르쳤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거나 죄의 용서, 은총 및 의를 얻도록 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홀로 아버지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중보자와 화해자가 되신( 딤전 2:6) 그리스도로 인하여 은총 가운데 받아진다는 것을 믿을 때 그 신앙에 의해서만 얻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행위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얻게 된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그리스도의 공적과 은총을 무시하게 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없이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길을 찾게 됩니다.  

신앙에 관한 이 가르침은 사도 바울이 여러 곳에서 취급하였습니다. 한 예로서 에베소서 2장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리고 아무도 우리가 바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꾸몄다고 교활하게 반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 모든 문제를 교부들의 증거로 뒷받침하게 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많은 저술물들 가운데서 행위의 공적에 반대하여 은총과 신앙의 의를 변호합니다. 그리고 암브로스는 “이방인의 소명에 관하여”(De vocatione genium)란 글과 다른 글 가운데에서 같은 뜻으로 가르칩니다. 그는 “이방인의 소명에 관하여”(Ⅰ,17)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은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의인이 여기에 선행하는 공적에 의하여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주신 분의 값없는 은사가 아니라 노동자에게 당연히 주어져야 할 보수가 되므로 결국 그리스도의 피로된 구속은 전혀 가치 없는 것이 되고,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자비보다 윗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신앙에 관한 이 교리가 경험이 없는 자들에 의하여 경멸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양심은 실제 체험을 통하여 이 가르침이 가장 큰 위안을 주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어떤 행위를 통하여 안정을 얻지 못하며, 그리스도로 인하여 화해되신 하나님을 모시게 된다고 확실할 때, 즉 신앙으로만 안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바울이 로마서 5장 1절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습니다. 이 가르침은 전적으로 공포에 떠는 양심의 싸움에 결부되어야 하는데, 사실 그 싸움을 떠나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의 의가 어떤 사회정의나 철학적인 정의에 불과하다고 몽상하는 경험 없고 세속적인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잘못 판단합니다.

복음으로부터의 위안을 듣지 않을 때 양심은 행위에 관한 가르침에 의하여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도 생활로 은총을 얻어 볼까 하여 사막으로 혹은 수도원으로 향하면서 양심에 쫓김을 받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은총을 얻고 죄를 보상하기 위하여 이와 비슷한 다른 일들을 꾀하였습니다. 불안에 잠긴 양심이 위안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은총과 죄의 용서와 의인(義認)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얻어진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이 신앙의 교리를 논하고 혁신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신앙”이란 용어는 (불경건한 자와 마귀까지도 잘 알고 있는, 약 2:19 참고) 역사에 대한 단순한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뿐만 아니라 그 역사의 효과, 이른바 사죄의 조항까지를 믿는 신앙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총과 의와 죄의 용서를 받는다는 조항이 그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인간과 화해하게 되신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에 모시게 된 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역시 그를 돌보신다는 것도 알며, 또한 하나님에게 간구하기도 합니다. 요컨대 이러한 사람은 이방 사람들처럼 하나님 없이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마와 불경건한 사람들은 속죄와 관계된 이 조항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수처럼 미워하며, 그에게 간구하지 않으며, 또한 그에게서 좋은 것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어거스틴도 “신앙”이란 말에 관하여 그의 독자들에게 경고하기를, 성서에 의하면 “신앙”이란 말은 불경건한 자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단순한 지식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공포에 싸인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나의 확신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사들은 선행으로 은총을 얻는다는 기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선을 행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다만 신앙뿐이며, 그 밖에 다른 아무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신앙을 통하여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새로워지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새로운 의향을 가지게 됩니다. “신앙은 선한 의지와 바른 행위의 어머니이다”라고 암브로스는 말합니다. (이방인의 소명에 관하여, Ⅰ, 25) 왜냐하면 성령이 없을 때 인간의 힘은 불경건한 감정으로 충만하며 하나님 앞에서 선한 행위를 행하기에는 너무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밖에도 그런 인간의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죄와 불경건한 생각과 공공연한 범죄를 감행하도록 충동하는 악마의 권세 아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정직한 생활을 하려고 노력은 하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공공연한 범죄로 더럽혀진 철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신앙과 성령 없이 인력으로써만 자신을 다스리려 할 때 볼 수 있는 인간의 미약함이란 이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한 이 교리가 선행을 금하는 것으로 여겨져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을 쉽사리 알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는가를 천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신앙이 없이는 결코 십계명의 첫째 계명이나 둘째 계명의 행위를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없이는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을 향하여 간구하지도 않고, 하나님에게서 어떤 것을 기대하지도 않으며 또한 십자가를 지지도 않고, 오히려 인간의 도움을 구하며 거기에 신뢰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신뢰심이 없으면, 온갖 정욕과 인간의 책략이 마음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교회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나에겐 없는 것뿐일세.
행동과 생각과 생활에 있어서“

제21조 성자숭배에 관하여

우리 교회는 성자숭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성자들의 유물은 우리가 각기 맡은 직책에 따라 그들의 신앙과 선행을 본받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가운데 기념으로 둘 수 있습니다. 마치 폐하께서 자신이 통치하시는 영토에서 토이기인을 축출하시기 위하여 싸움을 하실 때에 다윗의 본을 따르신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다윗과 같이 황제 폐하께서도 임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 앞에 중보자, 화해자, 대제사장 및 중재자로서 그리스도 한 분만을 두며, 성자(카톨릭에서 성자로 추대된 성자)에게 기도를 드리거나 성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번뇌 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도드리는 예배를 특별히 좋게 여기십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 1서 2:1)

이상에 말씀드린 것이 우리들의 가르침의 총체입니다. 그 가운데서 보실 수 있는 대로 성서나 세계적인 교회나 혹은 고대 교회의 저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진바 로마 교회와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형편이므로 우리의 교사들을 이단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판단은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의견충돌은 정당한 권한도 없이 교회에 잠입한 일부 악폐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도 다소 상이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감독들께서는 우리가 지금 작성한 이 신앙 고백을 보시고 우리를 관용할만한 적절한 아량이 있으셔야 할 줄 압니다. 그것은 교회의 법규까지도 어디서나 동일한 의식을 요구하리만큼 엄격하지는 않으며, 또한 모든 교회의 의식이 어느 때나 동일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고대의 의식을 열심히 지키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든 예식과 옛날에 제정된 규정들이 우리 교회에서 폐기되었다고 하는 것은 거짓되고 악의에 찬 비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악폐들 가운데에서 일부가 일반 의식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은 지금까지 공통된 불평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선한 양심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정된 바 있습니다.
2부 지정된 악폐를 설명한 조항

우리 교회는 신앙의 어느 조항에 있어서나 세계적인 교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처음 보는 몇 가지 악폐와 교회 법규의 취지와는 달리 그 시대의 부패로 인하여 잘못 받아진 악폐만을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그 중에서 변화된 것이 무엇이며 또한 양심에 거슬리는 이러한 악폐들을 사람들에게 지키도록 강요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지를 인자하게 다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우리 편에 대한 증오심을 더하도록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하여 민중 가운데서 놀라운 중상을 유포시키고 있는 자들을 결코 신임하시는 일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이렇게 자극시킴으로써 우선 이러한 논쟁을 일으킬 기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제 그들은 갖은 계교를 써서 우리가 주장하는 교리와 의식의 형식이 이러한 불경건하고 악의에 찬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틀림없이 아시게 될 것입니다. 세간에 떠돌아다니는 풍설이나 반대자들로부터의 욕설에 근거를 두어서는 진정한 사실을 파악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행해지는 의식들이 올바르고 지켜지는 것보다 더 잘 예식의 품위를 간직하도록 하며 사람들 가운데 경외심과 경건심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쉽게 판단하실 줄 믿습니다.

제22조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관하여

성만찬에 있어서 떡과 포도주 두 가지를 다 평신도에게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습을 따르는 것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마 26:27)는 주님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마셔야 할 잔에 관하여 분명히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만 사제들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라고 누구든지 교묘하게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0절 이하에서 모든 교중이 두 가지를 다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는 한 예를 들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습이 교회에서 오랫동안 존속해 왔으나 어느 때에 또는 누구에 의하여 변화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추기경 쿠사누스(Cusanus)는 본래의 관습이 변경된 때만은 말하여 줍니다. 그리고 시프리안(Cyprian)은 몇 곳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증거 합니다. 이 점은 제롬(Jerome)도 입증합니다. “사제들은 성만찬을 집행하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분배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실로 교황 겔라시어스(Gelasius)도 성만찬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한 일이 있습니다. (Dist. Ⅱ, De Consecratione, chap. "Comperimus"). 그런데 분리된 것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은 관습입니다. 교회 법규가 증거해 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에 반하여 들어온 관습은 어느 것이나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Dist. Ⅲ, chap. "Veritate" 및 다음 장들). 떡과 잔을 분리하는 관습은 성서뿐만 아니라 고대 교회의 법규와 교회 내에 있은 실례에도 반하여서 행해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성만찬의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사용하는 것을 좋아 한다면 그들의 양심에 거리끼도록 달리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만찬의 분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해 주신 것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까지 사용해 온 진행방법을 폐하기로 한 것입니다.

제 23조 사제의 결혼에 관하여

제욕하지 못한 사제들에 관하여 공통적인 불평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교황 피어스 (Pius Ⅱ, 1458~64)께서 사제들에게 결혼을 금한 어떤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보겠으나, 결혼을 다시 허락해야 할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합니다. 플라티나 (Platina, 이태리의 인문주의자)는 이런 취지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사제들은 이러한 공공연한 추문을 피하려 하기 때문에 아내를 얻었으며, 결혼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 합당한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 2절과 9절에서 말하기를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라”고 하며, 또한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9장 1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한다”고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독신 생활로 지내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번식하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창 1:28) 더욱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와 역사가 없어 인간의 힘으로 그 자신의 피조성을 변경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므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적합지 않은 사람들은 결혼을 해야 합니다. 인간의 어떤 법이나 서약도 하나님의 계명과 제도를 무로 돌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써 사제들은 아내를 얻는 것이 그들을 위하여 합당한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고대의 교회에서는 사제들이 결혼한 남자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바울 선생이 디모데전서 3장 2절에서 말하기를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고 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불과 400년 전에서부터 비로소 사제는 독신 생활로 지내야 한다고 무리하게 강요를 받았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교황의 포고문이 선포되려고 할 때, 격분한 사제들이 일으킨 소동 가운데에서 마엔세의 대감독(Mayence의 Siegfrid, 1075)이 거의 죽임을 당할 번 할 정도로 이에 대하여 사제들은 완강히 반항했던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과 인간의 모든 법에 거슬리고 또한 교황들 뿐 만 아니라 가장 유명한 교회 회의들에 의하여 제정된 교회 법규 자체에까지 거슬림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결혼만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맺어진 결혼까지도 갈라놓을 정도로 이 문제를 혹심하게 취급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인간의 본성이 점차로 약해져 감을 보아서라도 이 이상 악한 것이 독일에 잠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약점에 도움이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결혼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교회의 법규 자체도 옛날에 그처럼 준엄하던 것이 후대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약점을 고려하여 때때로 완화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제의 결혼 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일 결혼이 이 이상 더 금지된다면 어느 때인가 교회에 목회자가 부족할 날이 오리라고 사료되는 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이 효력을 나타내고 있고, 교회의 관습이 잘 알려져 있으며, 불순한 독신 생활이 정직한 사직 당국의 징벌을 마땅히 받아야 할 많은 부정과 간음과 다른 범죄들을 유발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의 결혼에 반대하여 가하여지는 것 보다 더 혹심한 벌이 전혀 가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존중히 여기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방 나라를 포함하여 모든 질서 잡힌 나라들의 법은 최고의 찬사로써 결혼을 경모(敬慕)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방 사람들과 사제들까지도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바로 결혼 때문에 교회 법규에 반하여 무참히도 사형까지 받게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 전서 4장 3절에서 결혼을 금하는 것을 악마의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결혼의 금지가 이런 종류의 형벌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상의 것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인간의 법도 하나님의 계명을 무로 돌리지 못하는 것처럼 어떠한 서약도 하나님의 계명을 무로 돌리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시프리안도 역시 약속한 정절을 간직할 수 없는 여자는 결혼을 해야 한다고 충고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간집 Ⅰ, 11) “만일 그들이 참으려고 하지 않든지 혹은 견디어 낼 수 없다면 정욕의 불 가운데 떨어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좋을 것이다. 적어도 그들의 형제, 자매들에게 거리낌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행해진 것과 같이 교회의 법규도 성년이 되기 이전에 서약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고 있습니다.

제24조 미사에 관하여

우리들의 교회는 미사를 폐기했다고 그릇되게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은 미사가 우리 가운데서 보존되고 있으며 최고의 존경을 받으면서 거행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관습적인 의식들도 보존되고 있으며, 다만 라틴말로 된 노래의 부분들만이 여기 저기 독일말로 옮겨졌을 뿐입니다. 그것은 민중을 가르치기 위하여 첨부한 것입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무지한 사람들이(그리스도에 관하여 알 필요가 있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바울 선생은 교회에서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라고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법률에 의해서도 역시 그렇게 제정되어 있습니다. (고전 14:2,9)

사람들은 누구나 받기에 합당한 범위 내에서는 함께 성례전을 받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으며, 또한 이렇게 행하는 것이 공중 예배의 존경과 경건을 더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선 듣고 자신을 검토하지 않고는 아무도 성례전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성례전이 불안에 싸인 양심에 얼마나 큰 위안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으며, 또한 성례전의 가치와 용도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받는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서 어떤 선한 것을 기대하며 요구하도록 배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또한 이러한 성례전의 사용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심을 기릅니다. 거기에 응하여 미사가 우리들 가운데서보다 우리의 대적자들 가운데서 더 경건하게 거행되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미사가 부끄러울 정도로 속화되었고 또한 돈벌이를 위하여 이용되어 왔다는 것이 오랫동안 모든 선량한 사람들의 공공연하고 매우 슬픈 불평이 되어 왔음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악폐가 모든 교회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고,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에 의하여 미사가 단순히 보수와 임금만을 위하여 거행되며,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법규에 반하여 미사를 거행하는가 에 대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만찬을 적합하지 않게 취급하는 사람들을 엄하게 경고하여 말하기를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으니라”(고전 11:27)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제들이 이러한 죄에 대하여 경고했을 때 보통 미사(missa privata)는 어느 것이나 돈벌이를 위해서밖에 거행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에서는 폐기되고 만 것입니다. (역자 주, 보통 미사 "missa privata; Winkelmesse; Low Mass"란 말은 대미사 "High Mass; Solemn Mass"와 대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데, 중세기 초부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사용되었다. 보통 미사에 있어서는 미사를 거행하는 사제만이 성찬을 받는 하나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특별한 것으로 의식 진행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보통이다. 이와 같이 사제에 의하여 개인적으로 매일 행해지는 미사의 관례가 널리 전파되었다.)

감독들도 이러한 악폐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적절한 시기에 이런 것을 교정했다면 현재의 분쟁은 퍽 적어졌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들 자신의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부패가 교회 내에 잠입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늦게야 그들은 교회의 곤경에 대하여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혼란이 그 이상 참을 수 없으리만큼 분명히 나타난 여러 가지 악폐에 의하여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미사와 성례전에 관하여 큰 분쟁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속화를 교정할 수 있고 또한 교정해야 할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 그렇게도 오랫동안 교회 내에서 용인되어 온 미사의 장구한 속화로 인하여 세상이 벌을 받고 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십계명에는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시작된 이래에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된 것 중 미사처럼 추한 돈벌이를 위하여 오용되어 온 것도 없을 줄 압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첨부하여 사적인 보통 미사를 계속 증진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그의 고난으로 원죄를 대속하시고, 매일 범하는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위하여 제물을 드려야 할 미사를 제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미사가 외적인 행위로 산 자와 죽은 자의 죄를 없이 한다는 일반적인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베풀어진 하나의 대미사가 개인들을 위하여 베풀어진 여러 개의 특별 미사만큼 가치가 있는가에 대하여 논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논의가 이상에 언급한 것 같은 미사들을 무수히 만들어 내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교사들은 이러한 의견에 관하여 경고하기를 그들은 성서에서 이탈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영광을 감소시킨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다만 원죄뿐만 아니라 역시 다른 모든 죄들에 대해서도 봉헌과 보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10장 10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10장 14절에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으심으로 다만 원죄만을 보상하시고 모든 다른 죄들을 같이 보상하신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은 교회에서는 전혀 듣지 못하던 새로운 제도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과오가 부당하게 비난을 받지는 않았다는 점을 모두들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성서는 역시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믿을 때”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신앙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미사가 외적인 행위의 수행으로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죄를 없이 한다면 의인은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사의 행위에서 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서는 이런 것을 결코 용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누가복음 22장 19절에서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5)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미사는 이 성례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신앙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떠한 은혜를 입게 되며, 또한 불안에 싸인 양심을 기쁘게 하고 위로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제정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억한다는 것은 곧 그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며, 그 은혜가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역사적으로 그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이러한 것은 유대인들이나 불경건한 자들도 기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사는 위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이 성례전을 베풀기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암브로스가 “나는 항상 죄를 범하기 때문에 늘 약을 먹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미사는 성만찬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일마다 하나의 공동미사를 행하며, 또한 다른 날에라도 어떤 사람이 성찬을 원하면 그들에게 역시 베풉니다. 이 관습은 교회에서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레고리(Gregory) 이전 교부들도 보통 미사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고 공동 미사에 대해서 매우 많이 말하였습니다. “사제들은 매일 제단에 서서 어떤 사람은 성만찬에 초대하고 어떤 사람은 만류한다”고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말합니다. 아울러 고대 교회 법규에 의하면 어느 한 사람이 미사를 집행하고, 다른 모든 장로들과 집사들이 그에게서 주님의 몸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케야 회의에서 제정된 교회 법규에 의하면 이러합니다. “집사들은 그 순서에 따라 장로들이 받은 다음 감독이나 혹은 장로에게서 성만찬을 받도록 하라”. 그리고 바울은 성만찬에 관하여 고린도전서 11장 33절에서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서로 기다리라”고 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사는 성서와 교부들에게 근거를 둔 바 있는 교회 내의 실례로서 확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특히 공적인 예식이 이제까지 대부분 의식적으로 보존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다만 미사의 수만 다를 뿐입니다. 그 수는 매우 크고도 분명한 악폐들이 가하여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줄이면 줄일수록 확실히 유익할 것입니다. 과거 가장 자주 모이던 교회들에 있어서도 미사가 매일 거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삼부사”(Historia Tripartita, Ⅸ, 38)가 입증하는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성서를 읽고 박사들이 이것을 설명하며 또한 성만찬의 엄숙한 의식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행해진다.”

제25조 죄의 고백에 관하여

우리들의 교회에서는 죄의 고백이 폐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먼저 검토하고 면죄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주님의 몸을 받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죄와 관련시켜 신앙에 대하여 매우 세심하게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전에는 이 문제에 관하여 전혀 언급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신자들은 사면이 하나님의 음성이고 또한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선언된 것이기 때문에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열쇠의 권능이 높이 칭찬을 받으며, 또한 이것이 불안에 싸여 있는 양심에 얼마나 큰 위안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케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면을 하늘에서 나오는 음성으로 믿는 신앙을 요구하시며, 그리스도를 믿는 이런 신앙이 과연 죄의 용서를 얻으며 받는다고 확언합니다. 과거에는 보상이 지나치게 격찬을 받았으며, 신앙(그리스도의 공적과 신앙의 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 비난을 받아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회개에 관한 교리가 우리 교사들에 의하여 가장 진지하게 취급되었고 분명히 나타났다는 사실은 우리의 대적자들까지도 용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교회는 죄의 고백에 관하여 죄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고, 또한 모든 죄를 세심하게 열거하는 번뇌로써 양심을 무겁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죄를 세밀히 서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에서는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시 19:12)라고 증거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라고 말합니다. 만일 세밀히 서술된 죄 외에는 아무 죄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양심은 전혀 평화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많은 죄들은 볼 수도 없고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4고대 작가들도 죄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다고 증언합니다. 교령 가운데서 크리소스톰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인용되어 있습니다. “나는 네가 네 자신을 공적으로 밝혀야 한다거나, 네 자신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비난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네 길을 하나님 앞에서 밝히라고 말하는 예언자에게 너를 복종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네 죄는 기도로써 참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라. 네 과오는 혀로 하지 말고, 네 양심의 기억으로 고백하라.” 그리고 교회 법규 주석서 난외의 주에도 (참회에 관하여: De Poenitentia, Dist. Ⅴ. chap. "Consideret") 죄의 고백은 (성서에 의하여 명령된 것이 아니고 교회에 의하여 제정된) 인간의 권리에 속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고백은 사면의 큰 유익을 주고 있으며 양심을 위하여 유용하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보존되고 있습니다.

제26조 음식물의 구별에 관하여

음식물의 구별이나 그와 비슷한 인간의 전통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데 유익한 업적이고 또한 죄를 보상할 수 있다고 하는 점은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그리고 항간에서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의식과 새로운 종교 제도와 새로운 축일과 새로운 금식이 매일 제정되었고 교회의 교사들이 은총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예배로서 이러한 행위를 엄격히 행했으며 또한 만일 사람들이 이 중에서 어떤 것이라도 지키기 않으면 그들의 양심을 몹시 괴롭게 했다는데서 분명히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전통에 대한 이런 견해로부터 많은 해로운 일들이 교회 안에 생겨났습니다.

첫째는 은총의 교리와 신앙의 의에 관한 교리가 이것으로 인하여 불명확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교리는 복음의 주요부분이며, 또한 교회에서 무엇보다도 뚜렷하게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적이 잘 알려지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를 용서 받는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 행위보다 훨씬 더 높여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율법과 인간의 전통들을 제쳐 놓고 이 은총과 신앙의 교리 조항을 가장 힘 있게 강조합니다. 그것은 크리스챤의 의가 이러한 행위와는 전혀 다른 것 곧 죄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값없이 용서받는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들이 음식물을 구별하는 것이나 그와 비슷한 예배 행사가 은총과 의를 얻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자아내게 한 전통에 의하여 거의 완전히 가려져 있었습니다. 회개를 취급할 때에 신앙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다만 보상의 행위만이 설명되어 있어서 모든 회개가 이러한 것으로 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둘째로 이러한 전통은 하나님의 계명을 흐리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은 하나님의 계명보다 훨씬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일정한 축일, 의식, 금식 및 예복 사용 같은 것을 준수하는데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것들의 준수는 영적 생활과 완전한 생활을 포함한 것 같은 한 매력적인 칭호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반면에 개개인의 직업에 관계된 하나님의 계명은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했습니다. 곧 아버지가 그의 후손을 양육하고, 어머니가 자녀를 낳으며, 군왕이 국가를 통치하는 일들은 세속적이고 불완전한 일이라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직책들은 이상에 말한 종교 관계의 직책들의 호화찬란한 준수에 비하여 훨씬 세속적이며, 불완전한 일이며, 천한 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오는 많은 경건한 사람들의 양심을 크게 괴롭혔습니다. 그들은 결혼, 관직 혹은 다른 사회관계의 직무에 관련된 것 같은 생의 불완전한 상태에 붙잡혀 있는 것을 슬퍼하였습니다. 그와 반면에 승려나 그와 비슷한 유의 사람들을 찬양하면서 이러한 사람들의 생활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것처럼 잘 못 생각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전통은 양심에 더 큰 위험을 가져 왔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전통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전통의 준수가 필요한 예배 행위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게르손(Gerson)은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졌으며 또한 어떤 사람들은 전통을 충분히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살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그 동안 줄곧 신앙과 은총의 의가 주는 위안의 말씀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기독교 교리 연구가와 신학자들이 교회의 전통들을 수집하여 이것으로 양심을 위무하려는 완화책을 찾고 있으나 결국 충분히 풀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때때로 양심을 더 괴롭게 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리고 학교들과 설교단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모으는데 매우 열중하여 성서에 접할 여가가 없었으며, 신앙, 십자가, 소망, 공민적 직무의 중요성, 그리고 아주 곤경에 처한 양심의 위무에 대하여 더 유익한 가르침을 추구할 여가가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게르손과 몇몇 다른 신학자들은 전통에 대한 이러한 분쟁 때문에 그들이 더 좋은 교리에 주의를 돌리는데 장애를 받는다고 통렬히 불평을 호소하였습니다. 어거스틴도 인간의 양심이 이러한 전통의 준수로 인하여 무겁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금하며 또한 이러한 것은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통으로 여겨야 한다고 야누아리어스(Januarius)를 조심성 있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잘 못 알고 의심하는 것처럼 우리 교사들이 이러한 문제를 경솔하게 취급하였다거나 혹은 감독들에 대한 증오에서 취급하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전통의 오해로부터 일어난 이러한 과오에 대하여 교회에 경고할 필요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복음은 교회 안에서 은총의 교리와 신앙의 의의 교리를 강조할 것을 우리들에게 강권합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전통의 준수를 의를 얻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사들은 우리가 인간의 전통의 준수로 인하여 은총을 얻거나 의롭게 될 수는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준수가 필요한 예배 행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교사들은 성서에 의거하여 더욱 더 많은 증거를 추가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15장 1~20절 가운데서 인습적인 전통 곧 율법적인 것 같이 보이며, 율법의 정화와 관계를 가진 전통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변호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 하는도다” (마 15:9)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무익한 예배 행사를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조금 후에 그는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마 15:11)고 첨부하십니다. 그리고 바울도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롬 14:17) 그리고 골로새서 2장 16절에는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골 2:20~21) 라고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0~11절에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베드로는 모세나 그밖에 다른 이들이 인정한 많은 의식을 가지고 양심을 괴롭게 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전서 4장 1절과 3절에서 음식물을 금지하는 것을 한 “마귀의 가르침”이라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그런 일들을 설정하거나 행한다거나 혹은 그와 같은 예배 행위가 없이는 크리스챤의 의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상은 복음에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대적자들은 조비니안(Jovinian)처럼 우리 교사들이 육신의 단련과 고행을 금한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교사들의 저작물 가운데서는 이와 퍽 다른 점을 알게 될 줄 생각합니다. 그들은 항상 십자가에 관하여 가르치고, 모든 크리스챤은 고난을 참아야 한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여러 가지 고난에 시달림을 받고,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를 지게 되는 일은 거짓이 없는 참되고 확실한 고행입니다. 이와 동시에 크리스챤 각자가 육체적 극기나 단련이나 노동으로 그 자신을 제어하며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우리 교사들은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넉넉함과 게으름 같은 것이 죄를 짓도록 유혹하지 못하게 하여야 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행하는 이유는 사죄나 혹은 속죄를 가능케 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육신의 단련은 어떤 몇몇 특정한 날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권장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시기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눅 21:34),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귀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 (마 17:21)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주) 한글판 성경에는 이 구절이 없음으로 표기되어 있음. 그러나 개정판 개역 성경 이전인 1965년까지에는 위의 구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임. 이 책은 1965년에 출간되었음.  

사도 바울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고전 9:27) 여기에 밝히 표시된 점은 바울 선생이 그의 몸을 친 것은 결코 이같이 함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도록 하려 함이 아니라, 그의 몸으로 하여금 영적인 일들과 그의 직분에 따라 책임을 수행하는 일에 합당하도록 하며 복종케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금식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행위로서 필수조건인 것처럼 여겨온 어떤 특정한 날자나 음식물 같은 것을 제정하여 양심을 위험에 빠뜨리는 유의 전통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 가운데서 관습으로 전해 내려온 많은 전승들이 아직도 지켜져 오고 있는데(미사에 있어서의 일과 순서나 특정한 성일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은 교회 내에 필요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유용하다고 봅니다. 동시에 그런 것들을 준수하는 것은 결코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는 점과 또한 그런 것들을 아무 관심없이 생략하여 버린다 해도 결코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사람들로 하여금 명심케 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제정한 의식이나 관례에 대한 그런 자유를 교부들이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로마에서 지키는 것과 다른 때에 부활절을 지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교회 사람들이 이런 상이점을 이유로 해서 교회 분열과 연결시켜 동방교회를 비난하였을 때 이와 같은 관습들은 어디서나 꼭 같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충고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레니우스(Irenaeus)는 “금식에 관한 의견 상치가 신앙의 일치를 파괴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황 그레고리도 그의 “차별론” 12, 가운데서 그런 차이점이 교회의 일치를 침해할 수 없다고 시사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삼부사” 제9권(Historia Tripartita, Lib. 9), 가운데는 많은 상이한 의식의 예들이 수집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의 본래의 의도는 어떤 특정한 성일에 관하여 규정짓는 법을 제정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경건(신앙)과 인간들 간의 좋은 관계(사랑)을 가르치는데 있었다.”

제 27조 수도사의 서약에 관하여

수도사가 행하는 서약에 관한 우리들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시기 위하여 우선 수도원의 상태가 어떠하였다는 점과 이 수도원들 가운데서 매일매일 얼마만큼 많은 일들이 교회의 법과 상반되게 행하여졌다는 점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어거스틴 당시 수도원은 자발적인 공동집단체였습니다. 후세에 이르러 규율이 퇴폐하여졌을 때 그 규율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서약이 첨가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짜임새 있게 설계된 감옥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 후 점차로 서약 이외에도 여러 가지 지켜야 할 종교상의 의식들이 가하여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속박 조건들이 교회의 법규에 반하여 많은 미성년자들에게도 굴레를 씌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령적으로 성장한 층에서도 자신의 힘을 판단하지 못하는 무지의 연고로 이런 구속된 생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하여 일단 사슬에 매인 자들은 비록 그 중 더러가 교회 법규에 준하여 해방을 받게 되었다고 하나 대부분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도록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약자인 여성에게 있어서 좀 더 친절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여자 수도원이 더하였습니다. 생활 유지를 위하여 청년 남녀들이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사실과 이런 조치로써 어떤 불행의 결과가 생겼는지를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어떤 부덕스러운 추문이 생겼으며 어떻게 양심을 괴롭히고 있는(덫을 놓는)지를 본 많은 뜻있는 사람들은 오늘날 이런 가혹한 일을 매우 불쾌하게 여겨왔습니다. 이와 같이 중요한 일에 있어서 교회 법규의 권위가 전적으로 무시와 배척을 당한 것을 매우 섭섭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서약에 관한 다른 하나의 견해(세례와 서약을 동일시함)가 이런 악에 더하여졌습니다. 이 견해는 과거 다소 이해가 있던 수도사들이라면 우구나 예외 없이 분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수도사들)은 세례가 서약과 동일하다고 말했으며, 이와 같은 생활로써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에 합당하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수도생활은 하나님 앞에서의 의(義)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받을 수 있게 만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수도생활은 규율(Praecepta) 뿐만 아니라 복음의 가르침(Concilia evangelica, 참고, 마 19:21)까지 준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수도사로서의 직책이 세례보다 훨씬 우월할 것이라고 믿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생활은 관공리나 인간이 만든 어떤 임무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준하여 그의 부르심에 응하는 목사 같은 이들의 생활보다도 더 공적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모두 그들 자신의 책 가운데 나타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상에 언급된 것 같은 사람들이 수도원에 들어 온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난  날에는 수도원들이 성서 연구의 학원이었고, 기타 교회에 유익한 학문의 전당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사와 감독들을 배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태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이제 온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들을 낱낱이 되풀이 할 필요는 없을 줄 압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배우기 위하여 수도원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수도원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얻기 위하여 설정된 것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들은 이런 수도원 생활이야말로 생의 한 완전한 단계라고 강조 혹은 확언하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다른 어떤 종류의 생활보다도 존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 여러 사실을 아무 불유쾌한 과장이 없이 반복한 것은 이 주제에 관한 우리들의 가르침이 더욱 더 잘 이해되기 위해서입니다.

첫째로 결혼하려고 하는 사람들에 관하여 우리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즉 독신생활을 하기에 합당치 못한 사람은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어떤 서약도 하나님의 명령과 제도를 무효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고전 7:2) 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명령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제도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경륜에 의하여 제외된 사람은 예외로 하고서는 그밖에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창세기 2장 18절 즉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은 이 점을 교시(敎示)하여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과 제도에 복종하는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하여 무슨 이의(異議)가 생길 수 있겠습니까. 각자 원하는 대로 서약의 의무를 찬탄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서약이 하나님의 명령을 폐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법규에 의하면 모든 서약은 고위 성직자의 권리 밑에 있습니다. 즉 모든 서약은 교황의 결정에 대하여 제한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럴진대, 하나님의 명령에 반하여 이루어진 서약이 얼마나 유효한가에 대해서는 가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만일 서약의 의무가 이유의 여하를 막론하고 변경될 수 없다면 로마 교회의 교황도 이 의무를 면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유래된 의무를 무효로 돌린다는 일은 누구에게도 적당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 교황은 이 의무에 관하여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교황이 종종 서약의 의무로부터 특면을 베푼 예들을 기록 가운데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라곤(Aragon) 왕이 수도원에서 불러냄을 받게 된 이야기는 잘 아는 한 예이며, 그밖에 현대에도 많은 실례가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의 대적자들은 서약의 의무나 효과는 과장하여 말하면서 어찌하여 자의적으로 될 수밖에 없고 또한 자유롭게 그리고 신중하게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서약의 본질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종신토록 순결을 지킨다는 일이 인간에게 있어서 어느 정도 가능한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서약을 행한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되겠습니까? 청년 남녀들은 그들의 판단력이 성장하기 전에 이미 서약을 하도록 설득을 받으며, 때로는 강제로 행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심사숙고하여 서약하는 것
  0
3500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 지하수의 대류현상이 지구온난화와 지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고.. 안형식목사 2010-06-07 2483
2 민주화 운동과 동학과의 관련성 여부에 대한 고찰 안형식목사 2008-10-20 3447
3 아우그스불그 신앙고백서[전문] 안형식목사 2008-08-31 2643
4 [노벨문학상 프로젝트] 서론 안형식목사 2008-08-05 2257
5    제4장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자 안형식목사 2008-08-05 2247
6    제3장 문화로 미래의 동력을 만들자 안형식목사 2008-08-05 2671
7    제2장 노벨문학상 수상국으로 가자 안형식목사 2008-08-05 2154
8    제1장 노벨문학상의 의의 안형식목사 2008-08-05 3491
9 쓰촨성 대지진과 운하건설과의 관련성에 대한 비교 연구 안형식목사 2008-07-02 2302
10 인지학과 발도로프 교육 (퍼온글) 안형식목사 2008-06-09 3592
11 [우찌무라 간조의 회심기] 안형식목사 2008-05-08 2540
12 제1장 한국의 기원에 대한 논쟁과 미제 안형식목사 2008-03-25 2455
13 [사회과학] "대한민국의 지도에 중도란 없다" 안형식목사 2008-02-10 2248
14    제8장 한국의 미래는 작가의 창작력에 달려 있다. 안형식목사 2008-04-07 11226
15    제7장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와 실적위주의 위험성 안형식목사 2008-03-13 1980
16       4. 정부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성장동력을 찾아 주는 일 안형식목사 2008-04-01 3016
17       3. 실용주의 방향성과 우선순위 제대로 잡고 있는가? 안형식목사 2008-04-01 1894
18       2. 이명박 정권의 아포리즘과 아고라에 대한 분석 안형식목사 2008-04-01 2027
19       1. 대통령 취임식에서 빛난 이명박표 실용주의 안형식목사 2008-04-01 2010
20    5. 경부운하, 경제적 효과는 커녕 적자투성이 안형식목사 2008-02-26 2529
21    4. 경부운하건설의 기술적 한계와 문제들 안형식목사 2008-02-10 2239
22    3. 간접취수에 대한 논의와 잠복된 문제 안형식목사 2008-02-10 2099
23    2. 강변지하수 취수, 대단히 위험하다. 안형식목사 2008-02-10 2243
24    1. 경부운하건설, 불요불급의 공약 안형식목사 2008-02-10 1985
25    제5장 이명박 당선인께, 추부길, 박석순 교수께 드리는 글. 안형식목사 2008-02-10 1672
26    제4장 동키호테인가? 거대한 사기극인가? 안형식목사 2008-02-10 2133
27    제3장. 버스중앙차로제, 시민의 등골만 빼먹는 정책 안형식목사 2008-02-10 2257
28    제2장. 부동산 가격 폭등의 원조 상암아파트 안형식목사 2008-02-10 1652
29    제1장 청계천 복원사업 비판 안형식목사 2008-02-10 1822
30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문화적 담론 (서설) 안형식목사 2008-01-10 1097
12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