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다음날
12. 다음날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칠복은 쇠죽을 끓여 송아지를 건사해 놓고 온 가족과 더불어 아침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한다. 워낙 가족이 많으니 상도 3개를 펼쳐 놓아야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었는데, 첫 번째 상에서는 이 집안의 대주이신 할머니와 박 초시 부부의 상이었고 두 번째 상은 첫째 딸인 경숙과 둘째 딸인 영숙 그리고 셋째인 여고 3 학년인 정숙이가 함께 먹는 밥상이었다. 세 번 째 밥상에서는 정숙이와 같은 여고 1 학년에 다니고 있는 종숙이와 중 3인 말째 동숙 그리고 칠복이 함께 밥을 먹었다. 여고 1학년에 다니고 있는 종숙이와 칠복은 동갑내기였다. 종숙이와 칠복은 1월생으로 생일이 빨랐다.
막내 동숙은 12월생으로 태어났다. 불과 1달 사이에 학년이 바뀔 수 있는 나이인지라 동숙이 초등학교 입학 때에 보낼까 말까 하다가 터울도 있는 것이 좋겠다 싶은 마음에 이듬해에 입학시키기로 내부적인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동숙이 하도 보내 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당해내지 못하고 제 때에 보냈다.
막내 동숙은 태어나서부터 제 언니인 종숙을 이겨 먹으려 했다. 언니 종숙이 가슴에 손수건을 붙이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동숙은 자기도 보내 달라고 어지간히 울어댔었다. 그런 동숙을 12월생이니 머리가 좀 덜 야물었다는 이유로 이듬해에 입학시켰다가는 온 동리가 떠나가도록 울고 또 울어서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을 듯 싶어 일단 보내보기로 했었다. 그래서 종숙이와 동숙이는 일년 차이이다. 일단 보내놓았는데 동숙은 입학하자마자 제 동기들을 휘어잡았다 했다.
박 초시는 칠복이를 영동 장에서 데리고 온 날부터 가솔들에게 칠복이는 한 가족이라고 단단히 못을 박아 두었다. 하지만 칠복이는 감히 한 가족이라고 생각지도 아니했다. 그저 가슴이 따뜻하신 분이라고 고마워할 뿐이다.
박 초시는 칠복을 자신의 집에 데리고 온 날부터 칠복의 인간됨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비록 한 가족과 같이 대하라고 엄명은 내렸으나 위인 됨이 어떠한지 아직 검증이 되지 않았음으로 한 달 동안 세밀하게 관찰해 보았다. 부러 어머니를 모시고 부부가 함께 외출을 하면서 안방에 지전을 놓아두어 보기를 서너 차례 했다. 하지만 전혀 칠복은 지전 가까이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외출하면서 고기와 과일을 마루 위에 놓아두고 먹고 싶으면 먹으라 해 보았으나 칠복은 손을 대지 않았다. 딸아이들을 대할 때에도 언제나 칠복은 상전으로 깍듯이 모셨고 칠복과 같은 나이인 종숙에게는 하대를 하고 있었으나 그 위부터는 아가씨로 호칭하였다.
어린 나이에 머슴일이 고되어 꾀를 부릴 법도 한데 단 한 번도 칠복은 꾀를 부린 적이 없이 성실하며 고요했다. 박초시가 부러 힘든 일을 맡겨 놓아도 칠복은 밤을 새워서라도 그 일을 꼭 해내고 말았다. 거짓말이라고는 모르는 아이. 허리가 부러지도록 성실하고 자신의 처지를 너무도 잘 알아 처신하는 아이. 박 초시는 칠복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에 한줄기 싸아한 아픔이 지나가곤 했다. 그 때마다 칠복의 장래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하겠다고 깊이 생각 되어지며 아들같이 키워 보고 싶은 아이라고 생각되어졌다.
이후부터 박 초시는 칠복을 아들과 같이 생각했으며 딸과의 차별은 없앴다. 아들로 키워보고 싶은 아이. 박 초시는 하늘이 아들이 없는 자신에게 내려 주신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칠복을 볼 때마다 한 편으로 든든해지기까지 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출근준비와 등교 준비에 부산해진다. 칠복은 빨리 밥을 먹고 잠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흠 칠복이 있느냐?”
“네 어르신”
깜짝 놀라 방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박 초시가 손짓을 하며 만류하고는 이내 칠복의 방으로 들어선다. 칠복은 깜짝 놀라 몸 둘 데를 모르고 엉거주춤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박 초시가 자리에 앉으며 칠복을 앉으라 한다. 칠복은 혹시나 하는 짐작이 있다. 동숙이 꽈 바친게 틀림없겠다. 이내 얼굴이 붉어지며 안색이 굳어지고 눈가에 핑글 물기가 감돈다.
“칠복아 힘이 드느냐? 내 할 말이 있어서 왔느니”
“네 어르신 말씀하셔유”
올 것이 왔구나. 여린 칠복의 가슴으로 한풍이 휩쓸고 지나간다. 나가라고 하면 어쩌나. 이제 겨우 정을 붙이고 사람대접을 받고 살고 있는데 이제 나가라고 하면 어디로 가나. 그 동안도 감사하지. 이런 집이 세상천지에 어디에 있나. 한 번, 단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마지막 힘을 다해서라도 받들어 모시고서라도 살고 싶은 칠복이 마음이다.
“칠복이 장래도 있고 해서 말인디, 공부를 할 마음이 있더냐?”
박 초시는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감히 얼굴을 보지 못하고 방바닥에 시선을 내려 깔고 있는 칠복이 측은해진다. 보면 볼수록 아이가 순수하고 맑다. 될 수 있는 한 부드러운 말투로 해라를 하지 않고 칠복이의 의사를 물어본다. 칠복은 공부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정말로 쫓아내려고 하는가 보다. 칠복은 순간 앞이 캄캄해지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대답도 없이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고 어깨까지 떨고 있는 칠복을 보며 박 초시는 채근했다.
“사내대장부는 글줄도 알아야 하고 반드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서 써 먹을 수 있는 인물이 되는 겨. 공부하고 싶지 않으냐?”
“아 아닙니다. 어르신. 제가 잘 못 했어유”
“무얼 잘 못 했다는 게야. 오늘부터 종순이 공부했던 책 가지고 공부를 좀 혀라.”
깜짝 놀라 튕겨지듯 고개를 들어 박초시를 보고 다시 고개를 내리는 칠복의 눈에는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이 아이가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부모를 잃고 천애고아로 사는 처지이니 그 아픔이야 오죽할까 하지만 사내가 이리 눈물이 많아서야 어디에 쓴단 말인가. 박 초시는 칠복이 뒤 떨어진 공부를 해서 실력이 되기만 한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고등학교까지는 졸업을 시켜 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생긴다. 공부하라는데 눈물이라니... 못난 놈. 이 아이 마음이 강해지도록 교육을 시켜야 하겠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독하게 마음먹어도 당하고 실패하는 세상인데 하잘 것 도 아닌 문제로 눈물을 보인단 말인가. 일순 박초시의 부드러워진 마음이 경직되어지고 굳은 마음에 굳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기 싫어도 공부혀라. 고등핵교까지는 공부혀야 한다. 아무리 대간해도 일을 마치는 대로 공부혀라.”
박 초시는 단단히 못을 박았다. 고등학교까지는 마쳐야 한다. 그래야 종숙이나 동숙이 중에 하나를 짝 지워 결혼시켜 줄 수 있다. 박 초시는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데릴사위 말은 남사스럽기도 하거니와 종숙이나 동숙이 중에 어떤 아이와 짝이 될는지 남녀관계는 알 수 없는 노릇이라 미리 짝 지워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칠복을 보던 박 초시는 송아지 한 마리를 서둘러 팔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칠복이가 송아지 두 마리를 건사하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지...
“지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구 공부하라구유? 어르신 고맙구먼유. 공부하겠슈. 열심히 하것슈”
칠복은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칠복의 마음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고 있는 중이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다만 눈물만 흐를 뿐이다.
박초시가 나가고 난 뒤에 칠복은 박초시가 자신을 이토록 아껴주고 신뢰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떨려왔다. 무엇보다 동숙이 꽈 바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적이 안도했다. 동숙이 옆에 있다면 꽈악 끼어 안고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칠복은 눈을 닦고 마당에 나와서 출근하고 등교하는 딸들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동숙이 종숙이와 함께 신을 신고 나온다.
“잘 댕겨와”
“그려 오빠도”
동숙이 그것이 눈을 살짝 흘기며 발소리도 요란하게 쿵쾅거리며 나간다. 혹시 하는 마음에 붙좇아 단단히 약조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어찌할 수도 없어 애가 탔다. 그려 핵교갔다 가 오면 그 때 단단히 약조를 받으면 되는겨, 설마 촉새같이 그 동안에 나불거리지는 않을겨. 그래도 사람 마음이야 그렇다 쳐도 그 주둥이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정거리는 사이에 얼추 동숙이와 종숙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 도무지 불안한 마음에 일이 손에 안 잡히는 칠복은 송아지를 이끌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어귀에 송아지를 이쪽, 저쪽에 매어 놓고 기다렸다. 송아지들은 부쩍 자라 이제는 중송아지가 다 되었다. 되새김질을 하는 입은 완전히 소의 형태를 갖추었고 덩치는 작아도 어미 소의 흉내는 다 내고 있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하루에 네 번 다니는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를 따라 들어오는 길과 논둑을 따라 조그만 야산을 돌아 이웃마을을 넘어 가는 길이 있었는데 이 길이 지름길이다.
버스는 거리에 따라 차비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웃마을 정류장에 가서 버스를 타면 차비를 절약할 수 있다. 어지간히 바쁜 일이 아니라면 구태여 마을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는 일은 없다. 보통은 이 길로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걸어서 다니곤 했다. 여고는 치마를 입었기 때문에 자전거를 탈 수 없어서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이 길의 특징은 굽어 있었고 불쑥 튀어 나온 바위로 인해 시야가 가려졌다. 저쪽에서 이쪽을 볼 수 없고 저쪽에서 이쪽을 볼 수 없다는 특징을 가졌다. 코앞에 불쑥하고 나타나야 누군지 알 수 있다.
“어머 어머머”
불쑥하고 코앞에 나타난 처자는 금자였다. 금자는 종숙과 동숙이와 함께 까르륵 하고 종달새처럼 조잘거리며 오고 있다가 불쑥 튀어 나온 칠복의 얼굴에 고만 간이 떨어지고 말았다.
“오빠아~ 오빠가 웬일이여?”
“오메 칠복이네”
“응 잘 댕겨 오는겨? 여그에 낭구가 있나 해서 송아지 끌고 나온겨”
“흥”
동숙의 코에서 폭풍같은 거센 바람이 나왔다. 금자는 얼굴이 빨개져서 토낀지 오래 되었다.
“정지에 감자 쪄 놓은 것이 있으니께 출출하면 먹어”
“응 고마워. 칠복아” 종숙이 고개를 까딱한다. 동숙이 고것은...
“냅사둬어 누가 감자 먹는데어?” 하고는 콧바람을 날리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종숙은 수고하라는 말 대신에 고개를 까딱하고 동숙이 뒤를 따랐다.
저녁상을 물리고 방에 들어와 엉덩이를 겨우 붙였는데, 대문이 열리며 손님이 찾아오는 소리가 난다. 충청북도의 전통은 대문을 잠가 놓지 않았다.
“박초시 어른, 저 왔습니다.”
“아니 박 선생 아니신가. 어쩐 일이여. 어서 오르시게”
방문을 열고 박초시가 옆집 박 선생을 맞이하는 동안 딸들은 박 선생에게 인사를 드리고는 우르르 제 방에 들어갔다. 마당에 내려서서 박 선생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아뿔싸 금자 아버지였다. 박 선생은 자신에게 인사를 드리고 있는 칠복이의 인사를 받으며 칠복의 얼굴을 잠시 주목했다가 열어 준 방문으로 들어가고, 마당에 남은 칠복의 간장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외양간 앞과 자신의 방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있는대로 청력을 동원하여 방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칠복이를 박초시가 불렀다.
“칠복아 잠깐 들어오너라.”
“네. 시방 들어 갑니다유”
있는 대로 몸을 움츠리고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칠복이 몸에 박 초시와 박 선생의 시선이 내리 꽂힌다.
“칠복아 인사 드려라. 옆집 박 선생님이시다. 동이 초등학교 서무주임선생님이시다.”
“처음 뵙겄습니다. 박 칠복이라고 헙니다유.” 칠복은 넙죽 큰 절을 올렸다.
“그래 칠복이 네 이야기 많이 들었다.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이라고 칭찬하시는 어르신의 칭찬이 계셨다. 더욱 잘 하거라”
“네 선상님.”
“에흠 칠복아 박 선생께서 동이 초등학교에서 여름방학 동안에 야학을 연다고 한다니 일 마치는 대로 가서 공부 하거라”
“야?” 깜짝 놀라 칠복을 고개를 들어 박초시와 박 선생의 얼굴을 보았다.
“야 그렇게 하것슈. 일러 주시는대로 하것슈”
“그래 되었다. 이제 나가 보아라.”
박 초시의 말에 칠복은 물러 나왔다. 댓돌에 놓인 신을 신는 순간에 칠복의 입에서는 휴 하고 긴 한숨이 나온다. 이제 살았다. 동숙이, 금자 이 두 처자들의 입이 무거운 것이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드는 칠복이다. 그리고 이제 근심이 사라지자 묘하게도 금자의 나신이 언뜻 스쳐간다. 쩟쩟 하며 상념을 물리치려 하나 달빛에 반사되는 나신의 묘한 실루엣은 도무지 칠복의 기억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당황하여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있던 금자의 동그스름한 어깨와 가냘픈듯한 등허리와 쪼그리고 앉아서 훤히 드러나던 허벅지와 엉덩이의 곡선이 눈에 삼삼하다. 에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칠복은 제 눈을 소매로 썩썩 비비고는 제 방에 들어가 누웠다.
도무지 심장병이 생길 듯 하여 못살겠다. 끌탕을 하는 사이에 밤은 깊고 별은 높이 떴는데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초여름의 뜨거운 지열이 사납게 덮쳐 오고 모기장 밖에는 모기떼들의 앵앵거리는 소리가 칠복의 귀를 거슬린다. 등줄기에 시원한 우물물을 쏟아 부었으면 달게 잘 수 있겠는데 고만 우물가를 생각만 하여도 어찌나 놀랬던지 눈이 따갑다. 뒤척이는 사이에 어느덧 고단한 칠복의 눈에도 안식이 찾아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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