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그림이 그려지다
24. 그림이 그려지다
눈이 열린다. 빛이 조금씩 각막을 투과하여 초점이 맞추어지더니 투명한 영상이 또렷이 박히며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다. 미래. 장래. 가슴이 뛴다. 심장이 노니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하고 가슴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진다. 잊어버리고 있던, 놓치고 있던 미래. 슬픔의 나날 속과 비참함의 질곡에서 겨우 빠져 나온 자신에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하늘을 보았다. 낮게 드리워져 있는 잿빛 커튼과 같은 어둠 속에서 하늘의 별은 낮게 떠 있고 반짝이는 빛으로 구름 사이사이에서 숨을 쉬고 있다. 하늘은 어둠 속에 코발트빛 선명한 색채를 감추고 있었고 잿빛 하늘은 투명한 잿빛으로 한낮 태양의 열기를 막아 주고 있다.
숨을 쉰다. 코를 한껏 벌려 크게 숨을 들이 쉰다. 미래, 장래, 내 날, 내 인생, 잿빛 하늘 속에 가려져 있는 눈이 시린 코발트빛의 청명함이 보인다. 칠복은 크게 숨을 빨아들이며 코발트빛 하늘의 자락을 빨아 들였다. 폐부 가득 생기를 빨아 들였다. 폐부 속에 빨려 들어간 생기가 역동을 하는가. 그림이 그려진다. 그림이 그려진다. 미래, 장래에 대한 그림이 그려진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그림이 그려진다.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칠순이...
온 가족이 함께 살 때에 그려지던 그 그림이 그려진다. 하나의 그림에 멈추어져 있던 그 그림이 자꾸만 연이어 그려진다. 어머니와 함께 살 그림이 그려진다. 집이 그려진다. ‘오냐 반드시 성공해서 우리 엄니 모시고 행복하게 살끼다.’ 칠복은 금자네 대문 앞에서 살짝 걸음을 바꾸어 정자나무가 있는 동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이 그려진다. 멈추어져 있던 시간이 돌아간다. 초침이 허공을 가르고 세월을 토막 내는 사이에도 멈추어져 있던 시간들. 화가의 손에 들려 있던 붓은 꺾어지고 미완성의 그림은 캔버스 위에 덩그마니 올려져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동안, 아름다운 색채를 창조해 줄 물감도 말라 버렸었다. 서러움도 슬픔도 사치로 여기고 살았던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있던 동안의 시간들. 비가 오고 난 후에 온 대지에서 물비린내가 음습하게 퍼지는 동안에 하늘은 뿌연 잿빛으로 제 모양을 잃어버리고 있던, 그 하늘을 바라보며 절망에 빠졌던 시간과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잠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별똥별이 스쳐 지나가는 하늘에 별똥별의 꼬리가 물려 있다.
지금 이 시간을, 지금 이 순간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그 누구도 내 생각 속에 들어오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칠복의 자아가 눈을 떴다. 장래에 대한 그림은 화폭을 가득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스케치 된 밑그림에 칠복은 하나하나 색깔을 주었다. 색깔이 입혀지고 색채의 윤곽이 잡혀지는 동안 칠복은 정자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기다리고 있을 박 선생 댁으로 발걸음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칠복이 금자네 집 대문을 기웃 열고 들어서니 마루에 앉아 있던 금자 어머니와 금자 아버지 그리고 금자가 반깃하며 금자가 댓돌로 내려서며 칠복을 환영한다. 조바심 내며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반가워하는 눈치가 완연하다. 댓돌로 내려서며 반기는 금자의 모습이 자못 자연스럽고 어여쁘다.
“선상님 지 왔시유”
“오냐 어서 오니라”
마루를 향하여 넙죽 인사를 올리니 마루에 앉아 있던 이들이 벌써 자리를 내어준다. 금자 어머니는 마치 아들을 맞이하는 듯 만면에 웃음을 띠고 옆자리를 내어 주는데 그 옆자리는 금자 자리였다. 금자는 엉덩이를 살짝 옮겨 칠복이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려 금자 옆에 앉거라”
“네 선상님”
정을 담뿍 들여 공을 들여 자신을 쳐다보아 주는 박 선생의 눈길이 고맙기 그지없다. 기껏 머슴 주제인데도 살갑게 맞아 주는 금자와 금자 어머니의 푸근한 눈길이 감사하다. 칠복은 편히 앉으라는 박 선생의 배려에 무릎을 꿇고 앉았던 다리를 풀었으나 여전히 가시방석과 같다.
칠복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던 박 선생은 측은한 마음이 들며 속으로만 아껴 주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칠복아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니 가슴이 뛰네?”
“야 선상님”
“금자가 공부했던 책하고 공책하고 싸 놨다. 깨끗하게 잘 쓴 책이니 숭하지는 않을겨. 대장부니께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약조를 해라”
“야 선상님 심껏 공부하겠슈”
“오냐 그래야지 그럼 그렇구 말구. 임자 과일 좀 내와요”
“야 정지에 준비 되어 있시유. 금자야 과일쟁반 내 오니라”
“야 엄니”
금자가 들고 온 쟁반에는 과일과 과자가 수북하게 담겨져 있다. 언제 준비했는지 식혜도 한 대접씩 내 왔는데 굵은 잣이 고명으로 띄워져 있다. 안주인의 섬세한 손길과 살뜰한 살림 솜씨를 보는 듯 하다.
“칠복아 어여 먹어라”
자신의 앞을 지나 칠복에게 건네지는 금자 어머니의 포크를 든 손길을 살며시 피해 다소곳이 앉아 있는 금자의 볼이 발그레하다.
“야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유”
칠복은 금자 어머니가 전해 주는 참외 한쪽을 건네받고 고개도 들지 못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금자의 마음이 달아오른다. 엉덩이를 반쯤 들었다가 다시 앉았다 하고 있다. 쭈뼛거리며 무슨 말을 내야 하겠는데 낼 수가 없어 가슴이 타들어간다.
“어여 입에 넣어라”
박 선생이 참외 한쪽을 입에 넣으며 칠복을 향해 손짓으로 재촉하니 그제야 칠복이 참외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금자의 엉덩이도 차분해졌다.
보면 볼수록 참 선하게 생겼다. 눈매가 가지런하고 눈에는 총명이 박혀 있는 듯 하다. 본래 태생이 머슴이 아닌데, 양반가문의 귀한 자식인데 졸지에 고아의 신세가 되어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해 아까운 인물이 걸출한 인물이 못 되고 머슴의 신분으로 떠도는 것이 안타깝다.
“칠복아 먹으면서 듣거라. 너는 양반 가문의 대가 곧은 양반자식이여. 시방은 머슴살이를 하고 있다만, 언제까지 머슴으로 살 수는 없는겨. 사내대장부는 야망을 가져야 하는겨. 꿈을 꾸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려야 하는겨. 그러면 그 그림대로 꿈대로 다 되는겨. 칠복아 그림이 그려지더냐? 네 장래의 소망이 무엇이냐”
“야 선상님 그림이 그려지네유. 아직은 희미하지만 무언가가 그려지는구만유. 선상님 감사드려유”
“오냐 칠복아. 부친이 안 계신다고 혀서 가문까지 잊어버리면 안 되느니. 네 조상님은 왕족이며 뼈대 있는 귀족가문이여. 아무리 벱이 바뀌어서 반상의 구별이 없다고는 허나 뼈대있는 자손은 반드시 가문을 기억하고 가문을 빛내야 하는겨.”
*
칠복아. 가문마다 내력이 있고 전통이 있는 법이란다. 구닥다리 같은 소리로 들릴지는 모르나, 뼈골에 새겨 두어야 하는 것이 가문의 내력은 곧 뿌리요, 뼈대란다. 가문마다 내력이 다르고 전통이 다르다. 사람이 먹고 사는 것이야 매 일반이니 그리 큰 특징은 없을 듯 하나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란다. 가문마다 독특한 먹거리의 양식이 다르고 다루는 방법도 다른 법이다. 무엇이든 삭혀서 먹어야 하는 가문이 있는가 하면 생식에 가까운 풋것을 즐겨 하는 가문도 있다. 보신탕을 즐겨 먹는 가문이 있는가 하면 보신탕 먹는 풍습을 야만시 하는 가문도 있다.
기실 먹거리와 먹거리를 다루는 양식에서 벌어지는 문화권의 간극은 아주 작은 차이지만 생활의 양태와 사고의 틀에 고스란히 나타난단다. 간극, 간극은 플레이트와 그리드의 사이를 간극이라고 하는거야. 문화권의 간극. 중학교 3학년 과학에 나오는 말로 풀어 보자. 이것은 마치 3구 이상의 진공관처럼 필라멘트와 플레이트 사이에 있는 그리드 (grid)와 같단다. 3구 진공관은 펄스파를 만들어 내는 기본적인 진공관으로서 필라멘트에서 발생하는 빛을 그리드로 제어하여 빛을 굴절시켜 펄스의 형태로 만들어 주는 기능이 있지. 그리드에서 제어된 파형의 빛은 플레이트에 닿아 전기적인 신호인 펄스파로 바뀌는데 그리드에서 보내는 신호가 일정하다면 그 펄스파 또한 일정하고 균일하단다. 곧 가문의 가훈 혹은 가문의 교훈, 전통이라는 신호를 받은 그리드는 일정하게 삶의 철학과 가치관 그리고 사고의 틀을 제어하여 가문의 독특한 문화권인 펄스파를 형성해서 파형을 만들어 플레이트에 전달하게 하지. 이로써 의사 가문에서는 의사가 배출되고 교사 가정에는 교사가 배출되고 장사로 성공한 가문에서는 성공적인 장사꾼이 배출 되는 가문적인 특성이 설명이 되어진단다. 익숙한 신호를 받으며 성장하기 때문이지.
가문의 전통이나 교훈 그리고 가훈이 없는 평범한 가정에서는 개인의 우수성 정도에 따라서 다방면의 인재가 배출되어지는 것인데, 가문의 독특한 전통이 있는 가문끼리의 결혼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점을 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 먹거리에 대한 양식의 차이가 상당한 문제점으로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는 문화권의 충돌이다. 풋것을 좋아하는 가문의 문화적 특성과 삭힌 것을 좋아 하는 가문의 문화적 특성이 서로 마주칠 때 합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벌어져 있는 간극을 좁히지 못해서인데 특히 기독교 가문과 불교 가문의 결혼은 파경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단다. 제사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문화권의 충돌은 어느 한쪽 문화권에 대한 포기가 있을 때에나 결합이 가능하단다.
칠복아 놓치지 말고 들어 두어라. 문화란 역사와 삶의 수레바퀴가 지나간 흔적이다. 그 문화가 쌓이면 혈통과 혈통 사이, 전통과 전통사이 그리고 사회와 사회 사이에 문화권이 생긴단다. 문화권이란 역사관과 사상이 전통과 맞물려 재생산되는데 그것이 곧 가문의 전통이 된단다. 그래서 그 가문에서는 생각의 우선순위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가치관의 판단도 전통대로 나타나게 된단다. 생각의 틀이 그리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거란다.
칠복아 그래서 사람은 먹거리를 구별해서 먹어야 하고 가문에서 금하고 있는 것은 입에도 넣지 말아야 한단다. 그 구별에 따라서 사람을 구별하게 되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게 되는 거란다. 중한 것과 경한 것을 구별하는 것도 대쪽같은 선비의 기개도 다 거기에서 나오게 된단다. 이것이 가치관이란다. 험하게 살아온 사람은 그것을 구별하지 못해.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 못하고 닥치는 대로 먹는 사람은 이성교제와 결혼에서도, 직장생활에서도 삶의 전 영역에서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게 된단다.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사람은 더 볼 것이 없는 사람이란다. 그런 사람은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란다.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야.
칠복아. 주는 사람이 되어라. 주는 사람이 남는 인생을 사는 거란다. 주어라. 주기 위해 공부해라. 많이 주기 위해 억척스럽게 공부 하거라. 자신이 자신을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면 승리자가 된 것이란다. 그것이 성공한 사람이야. 그리고 어떤 문화권이라도 소화해서 리드를 할 수 있는 리더가 되어라. 큰 뜻을 품고 큰 사람이 되어라. 국가와 민족을 향도해 나갈 만한 인물이 되거라.
*
“칠복아 우리 금자가 칠복이를 좋아하는 눈치인디, 자주 놀러 오도록 혀, 우리 금자 애태우지 말구”
참외를 먹고 나서 복숭을 먹던 칠복의 목에 복숭의 과육이 콱 틀어 박혔다. 컥 하고 나서 미끌해진 복숭의 과육을 한 번 더 씹어 목으로 급히 넘기고 나서야 대답 할 수 있었다.
“어머 어머 아부지두... 참말로 난 몰러”
얼굴이 빨개진 금자의 모습을 보고 박 선생은 너털웃음을 짓고 금자 어머니는 아예 이 틈에 쐐기를 박아 놓을 참인 양 빈틈을 노리고 있다가 칠복이 당황하는 모습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금자에게서 앵두나무 우물가의 사건에 대해서 들은 것은 며칠 전 이다. 금강에 피서를 댕겨 오고 난 날 밤에 금자가 머뭇거리며 할 듯 말 듯 하다가 마침내 용기가 났다는 듯한 표정으로 얼굴이 빨개져서 우물우물 고백한 앵두나무 우물가 사건.
어머니는 아이가 왜 이런 고백을 하는지, 아니 왜 이런 고백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날 동숙의 태도를 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마치 제 서방이나 되는 듯 아련한 눈빛을 주고 있는 동숙과 칠복을 싸고 도는 동숙의 저돌적인 태도에 마음이 여린 금자가 혼자서 얼마나 고민을 하고 있는지 어머니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 아이가 벌써 다 컸구나. 사랑하는 감정을 고백하는 것을 보니 아이가 벌써 다 컸구나. 딸 아이를 잘 키웠다는 대견함과 뿌듯함도 있으나 그런 감상에 빠져 있을 때는 아니다. 칠복의 위인 됨에 대한 소문은 온 마음에 쫘악 퍼져 있었고 박 초시가 데릴사위 감으로 데리고 왔다는 소문도 퍼져 있는 터이다. 칠복이 머슴이라는 신분이라는 문제 외에 다른 문제는 전혀 없다. 대상이 박 초시 댁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될 뿐, 박 선생도 칠복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이 확실한 이상 주저할 것도 없다. 더구나 관습이나 운명에 의하면 금자와 칠복이는 보통 운명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갈 수 밖에 없다. ‘이 참에 못을 박아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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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에서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먹잇감을 발견했는지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는 날개짓 소리가 들렸다. 열어 놓은 뒷문 담장 가까이에 대나무 잎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가 낮게 들린다. 박 선생과의 연애시절이 떠오른다. 애를 많이 먹였던 사람이었다. 공부에 빠져 연애는 사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 이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른다. 함박눈이 함박내리는 밤에 그 미끄러운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떡을 머리에 이고 날랐다.
박 선생은 4대 독자로 태어났다. 공부머리가 워낙 출중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진로를 고등고시 공부로 잡았다. 박 선생이 고등학교 3학년인 1949년에 제정 고시된 고등고시령은 마치 박 선생을 위해 제정된 것 같았다. 유지였던 박 선생의 부친은 4대 독자라는 이유와 고등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인재라는 이유로 민의원에게 줄을 달아 군청에 손을 써서 군징집을 면제 받았다. 박 선생이 고등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에 6.25 전쟁이 터졌다. 민병대로 편입되어 실질상의 군징집을 면한 박 선생이었으나 전쟁의 참상은 4대독자고 5대 독자고 간에 지원하기만 하면 군인이 되었다. 고등학생까지도 학도 호국단이 되어 자원입대를 했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전쟁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에 의하여 정부는 후퇴를 거듭했고 끝없는 피난민 행렬이 만들어졌다. 7월 5일 유엔결의에 따라 우선적으로 급파된 미국 제24사단 21연대 제1대대가 오산에서 북한군과 처음으로 교전했으나 패배하고 금강으로 후퇴,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오산이 떨어지자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몰아 7월 6일 평택역전은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7월 7일 천안이 떨어졌다. 7월 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국에 연합군 파병을 통과시켰고 미국의 맥아더 원수가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7월7일 포항에 미 제 24사단 3연대가 상륙했다.
북한군이 대전을 점령한 뒤, 호남 및 경상북도 왜관, 영천, 포항 등지로 나누어 남진해 오며 진지를 구축했다.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유엔군은 총사령부 아래 한국군을 포함시켜 작전계통을 통일하고 미 제24사단, 미 8군 등을 계속 투입, 북한국의 남진속도를 둔화시킨 다음 낙동강전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아 지상군의 증원부대를 확보할 시간을 벌기 위해 국지전을 벌였다. 7월 24일 경북 예천이 북한군의 전차포 사격에 화염에 휩싸였다.
7월 초순이 되자 대전에 내려와 있던 정부가 대구로 이동했다. 서울에서 난리를 피해 피난 온 피난민들은 정부가 옮겨가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역전에는 피난민들로 인해 3일장이 사라졌고 연이은 포성과 폭격소리와 화염에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교 밑에서 피난 중이던 양민 300여 명이 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흉한 소식까지 들려왔다.
박 선생의 부친인 박 진사는 혹시나 하여 아들을 뒷산 동굴에 숨겨 두고 이태를 버티어냈다. 그러나 양심에 부대껴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던 박 선생은 아버지 몰래 민병대 편입증을 가지고 자원입대하고 말았다. 하지만 입대하자마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는데 박 선생은 한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최전방인 양구에 소총수로 배치되었다. 전방의 소총수는 총알받이라는 별명이 있던 때였다.
집안에서는 박 선생이 군대에 가서 보내온 편지를 보고서야 행방불명이 된 아들이 살아서 군대에 가 있는 줄 알았다.
박 선생이 군대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듣도 보도 못한 양구까지 면회를 다녀왔다. 생전처음으로 도를 벗어난 먼 나들이였다. 오고 가는 길이 그리 험하니 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부모님의 염려를 뒤로 하고 그예 양구까지 다녀왔다. 물어물어 간신히 부대 면회소에서 면회 신청을 했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록 기다려야했다. 면회자에게는 외박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 절차를 밟느라고 오래 걸렸다는 말로 반가움을 표시한 박 선생을 와락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무섭고 마음 졸이고 불안했는지 실신할 지경까지 되었었다.
박 선생은 자신의 가슴에 쓰러지듯 안겨서 우는 그녀를 꽉 안아 주었다. 졸병 주제에 감히 여기가 어디인데 연애질이냐는 듯 눈총을 쏘아대는 선임자들도 있었지만, 박 선생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를 힘주어 안고 눈을 감았다. 박 선생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양구가 어디인지 이렇게 험하고 깊은 산중인지 전혀 몰랐다. 훈련을 마치고 부대배치를 命받아 관물을 호로백에 넣고 어깨에 짊어지고는 같은 부대에 배치를 받은 동료들과 함께 열차를 타고 양구역에 도착하여, 부대에서 보낸 지엠시를 타고 흔들거리면서 도대체 얼마를 지났는지도 모를 시간이 걸려 도착한 부대였다. 덜컹거리는 지엠시 안에서 얼마나 두렵고 떨렸는지 모른다. 이제 들어가면 죽어서 나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여 두려움에 떨었었다.
그 때가 생각이 난다. 더구나 가녀린 가희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얼마나 고통이 심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하루하루의 고된 훈련과 경계임무의 긴장감 속에서 유일한 낙과 기쁨은 매일 보내 주는 가희의 편지 덕분이었다. 이제야 가희의 사랑이 얼마나 되는 사랑인지를 알게 되었다. 만나기만 하면 가슴에 꼬옥 품고 길고 길었던 겨울의 시린 이야기를 풀어 주리라. 가희의 애틋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남자인지에 대해 고마워하리라.
훈련의 고통이 아프면 아플수록 저 깊이에서는 가희의 사랑이 꿈틀대며 힘을 북돋아 주고 있었다. 행복한 미래를 위해 조금만조금만 더 힘을 내라는 마음의 소리가 언제나 힘들고 지칠 때마다 들려 왔다. 어여쁜 입술로 가지런한 하얀 치아에서 수줍은 듯 입속에서 오물거리던 어여쁜 혀로 그녀는 언제나 힘을 북돋아 주었다. 자신에게 면박을 받으면 찔끔하며 혀를 쏘옥 내밀었다가 집어넣고는 잘 못 한 것도 없는데도 잘 못 했다고 용서를 구하던 가희였다. 돌이켜 보면 가희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함부로 대했구나. 이토록 소중한 사람에게 내가 모질었구나. 만나면 가희의 어여쁜 눈을 내 눈에 담고 마주보며 용서를 구하리라. 가희가 보내오는 편지에는 언제나 자신을 염려하고 동경하고 사랑하는 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보지 못하는 설움까지 겹쳐 아린 마음이 글에 담겨져 있었다. 편지지에는 박 선생을 보지 못한다는 설움으로 하루하루의 삶에 의미마저 퇴색해 버린 듯, 허공을 향해 양구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가희의 마음이 언제나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편지의 내용만으로는 성에 안 찬 듯 하루에만 세통의 편지를 보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박 선생은 그 때마다 울었다. 호랑이 같은 선임자들을 의식해서 화장실 변기 위에 걸터앉아서 그 편지들을 읽으며 울었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눈물이 핏물이 되어 강을 이룬다면 볼 수 있을까. 미치도록, 미치도록 보고 싶다.
부대에 배치 받은 후에 군종실에서 실시하는 부대원 신상상담을 받았었다. 그리고 교회에 갈 생각이 나면 언제나 군종병에게 의사를 전하라는 전도를 받았다. 신참 주제에 교회에 나간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엄한 분위기에서 배치 받은 후 한 달 만에 박 선생은 군종병에게 도움을 청했고 부대에 배치 받은 후 한 달이 되어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교회에 처음 나간 날 박 선생은 예배드리는 시간 내내 울었다.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울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울었다.
가희, 내 심장에 핏빛으로 각인 되어 있는 이름. 기도란 자신의 소원을 절대신인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소원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는 것이라고 설교하는 군목의 설교에 힘을 얻고 박 선생은 가희를 불렀다. 보고 싶다고 미치도록 보고 싶다고 만나게 해 달라고 울면서 빌고 또 빌었다. 이윽고 눈을 떴을 때, 눈물 사이로 강대상 너머에 있는 나무 십자가가 뚜렷하게 보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가희의 얼굴이 잔상으로 희미하게 보였다. 이래서 기도하는 것인가? 이래서 교회에 나가는 것인가? 무언가 모를 평온함이 찾아 왔다. 마음 편히 먹고 주어진 임무를 잘 하고 있으면 가희가 찾아 올 것이라는 마음의 속삭임도 들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가희가 찾아 왔다. 면회소에서 대대를 통해 전달되어진 전통에 면회자의 이름이 가희라 했다. 면회자는 즉시 외출복 착용하고 대대본부에 집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소대장은 마치 자기가 면회자라도 되는 듯 재촉해댔다. 하지만 신참 주제에 외출 준비를 할 수도 없었던 박 선생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정신만 아득하다. 마침내 외출복은 선임자들이 나서서 다려 주었고, 군화는 선임자의 것을 신기로 했다. 소대장이 어지간히 극성을 부리는 것으로 보아 오늘 밤에는 집합이 있을 것 같다.
외출 신고를 하고 나서 허둥지둥 대대본부로 돌격하니 중대장이 외박증을 끊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대대본부에 왔던 군목이 연대 본부로 가는 길이니 군목의 짚차에 동승하라 한다. 쭈뼛거리던 박 선생을 군목을 서둘러 찝차에 태웠다. 눈길이 갔다 했다. 예배 내내 울면서 하늘을 보는 듯 교회 천장을 향하는 눈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박 이병에게 향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노라고 했다. 좋은 추억과 멋진 발전을 이루어 내는 군 생활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 했다.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고 했다. 기억이 날 때마다 기도해 주겠다 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지체 말고 찾아오면 즉시 도와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애인이 찾아 왔느냐고 물었다. 결혼을 약속한 멋진 관계냐고 물었다. 박 선생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난 군목은 주머니에서 오백원짜리를 꺼내 손에 쥐어 주었다.
하사 초봉이 300원이었던 시절에 500원이라는 돈은 없는 이에게는 몇 개월의 생활비로도 쓸 수 있는 돈이었다. 울상을 지으며 한사코 거절하던 박 선생에게 군목은 힘주어 말했다. 살면서 누군가를 꼭 도와야 하겠다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거든, 그런 사람이 생긴다면 그 때에 오늘을 생각하며 있는 힘을 다해 도우면 된다고 했다. 박 선생이 다시 눈을 떠서 바라본 군목은 태산이었다. 반드시,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신의 눈을 응시하는 군목에게 박 선생은 힘을 주어 눈으로 약속했다.
첫날밤. 부대 선임이 가르쳐 준대로 양구시내에서 제일 좋다는 양구여관을 찾았다. 그 무서운 전쟁통을 겪으면서도 다행히 부서지지 않은 몇 개의 건물 중의 하나였다. 박 선생은 옆에 꼭 붙어 따라오는 가희와 자신을 향해 야유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으나 눈을 땅에 박고 걸었다. 지나가던 장교가 두 사람을 바라본다. 경례를 하고는 바삐 움직여 지나쳤다.
“가희야 먼길 오느라고 고생 많았지?”
방안에는 알록달록한 침구가 깔려 있는 온돌방이었는데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져 있었고 작은 탁자 위에는 물주전자와 물컵이 담겨져 있는 쟁반이 놓여져 있다. 처음으로 보는 낯 설은 풍경에 두 사람은 어지간히 부자연스럽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짧은 침묵의 순간에 목울대로 마른 침이 넘어간다.
“아까 면회소에서 꼬옥 안아주는디 부끄러워서 죽을뻔 봤시유, 그래두 엄청 포근하고 좋았는지 몰라유. 잘 왔다 싶었어유”
“나두 엄청 좋았구먼 우리 가희가 여그까지 면회를 와 줄줄은 꿈에도 몰랐구먼. 고마워. 평생 잊지 못할겨”
“많이많이 보고 싶었어유. 하늘에 흰 구름만 떠가도 그 구름타고 석인씨 부대에 가고 싶어서 울었어유”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조곤조곤 입을 여는 입술에 입맞춤하고 싶다. 퍼머 머리에 드러나 있는 낯으로부터 귓불에 이르는 선이 머리털 사이로 살짝 드러난 하얀 살이 파르스름하다. 파르스름한 그 선을 보노라니 불같은 욕정이 불끈 솟아오른다. 덥석 안고 입맞춤하고 싶다. 탐스러운 젖가슴을 만지고 싶다. 하지만 석인의 마음속의 불덩어리는 한 템포 늦은 손길에 고만 순간을 놓치고 잿더미가 되었다.
“그랬어?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남? 나도 가희가 보고 싶어 죽을 뻔 봤어”
손을 줄 듯 줄 듯 하면서도 주춤거리고 있는 석인의 머뭇거리는 손을 가인이 잡았다.
“석인씨 안아 줘요. 면회소에서 안아 주었던 것처럼 안아 주세유”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 오른 가인이 흥분으로 더듬더듬 거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사랑해 가희야 사랑해 가희야 사랑해 가희야”
석인은 울고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석인은 가희를 끌어안았고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가희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가희의 팬티에 석인의 손길이 닿자 가희는 움찔하며 순간적으로 석인의 손을 잡았다가 풀었다.
창가로 어른거리는 밤나무의 잔가지가 떨고 있다. 가희의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겹쳐진 것도 걸쳐진 것도 없다. 가희는 부끄러움에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가희의 하얀 알몸에 석인의 손길이 지나가며 빨간 자국을 남기고 있다. 가희는 온몸을 잔뜩 움츠렸으나 석인의 입술이 배꼽을 지나 하복부로 내려갈 때에 가희의 온몸은 펄쩍 뛰어 올랐다.
“어머 어머 거기는 안 되유, 거기는 안 되유”
깜짝 놀라 눈을 똥그랗게 뜨고 손으로 막는 가희의 손을 치우며 석인의 손은 까실한 감촉이 느껴지는 음모를 쓰다듬었다. 한 동안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다리를 꼬고 있던 가희의 다리가 풀려지기 시작했다. 그랬다. 석인은 자신도 두려움에 떨며 들어 왔던 첩첩산중의 부대를 찾아 와 준 가희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가희의 발가락부터 손가락 머리카락 하나가 소중했다. 그 마음을 담아 석인은 가희의 온몸을 소중하게 어루만졌고 혀로 핥아 주었다. 수줍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가희를 뒤집어 놓고 어루만지고 핥아 주었다.
“아아악~”
낮고 짧은 비명 소리가 나고 잠시 후에 숨을 참으며 온몸으로 파득거리던 가희의 고통스러운 몸동작이 멈추었다. 석인과 가희는 가장 가깝게 온몸을 밀착하고는 동작을 멈추었다. 눈을 뜨면 부끄러워 다시 눈을 감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다. 이 순간 석인의 감긴 눈을 보고 싶다. 살짝 눈을 뜬 순간 석인의 동공과 마주쳐 버렸다. 깜짝 놀라 질끈하고 눈을 감아 버렸으나 심장의 고동소리는 천둥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찰나의 순간에 마주쳐 버린 눈길. 잠잠한 눈길로 자신을 보아 주고 있는 석인의 다소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에 깊고 그윽한 까만 수정과 같은 눈동자와 살며시 뜨던 자신의 눈동자가 얼켜 버렸다. 콩딱 콩딱 뛰는 가슴의 두근거림과 답답한 숨을 참으면서도 가희는 하복부로부터 전해져 오는 아련한 아픔에 행복해졌다. 그랬다. 아릿한 아픔이 있는데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 참으로 신기했다.
가희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석인을 힘을 주어 껴안았다. 이렇게 평생을 살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편히 치룰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든다. 눈을 감고 하늘의 신께 빌었다. 우리 이렇게 살게 해 달라고, 평생 이렇게 살게 해 달라고 그리하시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선한 손길을 내어 주며 살겠다고 빌고 또 빌었다.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있다. 가희의 배 위에서 석인도 똑같은 기도를 하고 있었다.
또르륵 하고 굴러 떨어지는 석인의 눈물이 가희의 얼굴에 떨어지며 뺨으로 퍼졌다. 가희는 다시 석인의 듬직한 어깨를 꼬옥 힘주어 안았다.
“안아 주셔서 고마워요.”
“안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두 사람은 무언의 약속을 단 한 번도 깨뜨린 적이 없었다. 그날 밤에 가희는 두 사람의 사랑의 씨앗을 잉태했다. 금자였다.
두 정인이 결혼을 하고 어른들을 모시고 사는 중에 문중어른인 박 초시의 권유에 의해 현재의 집을 샀다. 대처로 떠나는 원래의 집주인이 싼 가격에 내놓은 집을 박 초시가 나서서 혹할만한 시세로 흥정이 되었다는 기별을 받고 고심 끝에 박 선생의 부친과 모친이 분가시키기로 결정을 했다. 이어 집을 매입하고 살림을 내 주었다. 금자 이후로 자식을 보지 못했다.
언제나 두 사람은 서로를 대할 때마다 잔 떨림이 있었다. 서로 마주치기만 해도 연애할 때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서로가 끊임없이 사랑했고 끊임없이 서로를 원했다. 그 감정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한 감동이었고 언제나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
박 선생은 다시 칠복을 이윽히 눈여겨 바라보았다. 많은 아이들을 만나 보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칠복이처럼 눈에 박히는 아이가 없었다. 박 초시가 칠복을 금쪽 같이 여기는 이유를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이 아이에게는 무언가가 있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 마침내 상대의 눈 속에 박혀지는 그런 무언가가 있다. 천상의 뜻이런가. 천상의 기운을 받은 아이인가.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드는 특별함이 있다.
사람을 잘 만나야 할 터인데, 앞길이 창창한 이 아이를 잘 지도해줄 사람을 만나야 하고 이 아이가 잘 자라서 성혼을 하게 된다면 좋은 처녀를 만나서 결혼을 해야 하리라. 보면 볼수록 귀골이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뽀송한 얼굴이나 귀티를 타고 났다. 심성이 착한데다가 정직하고 순수하며 우직하리만큼 성실하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먼저 찾아서 하는 아이. 여기에 학식까지 갖추게 된다면 한 사람의 몫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멋진 대장부가 되리라.
박 선생은 여기에서 허억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 아이에게 투자를 하고 싶다. 한 번 걸출한 인재로 만들어내서 보람을 안고 싶다. 먼 옛날 군목과 했던 무언의 약속이 생각이 난다. 혹시 이 아이를 두고 한 약속이 아닐까. 이 아이라면 금지옥엽으로 기른 금자를 맡길 만도 하다. 이 아이와 금자. 그림이 그려진다. 자신이 칠복의 뒤를 보아 준다면 충분히 해낼 능력도 있다. 만약 박 초시 어른이 이 아이를 놓아 주기만 한다면 후한 사례를 치루고 데려 와서 키우고 싶은 마음이다.
칠복을 보내 놓고 나서 박 선생은 부인과 함께 자리에 누워 칠복이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그리고 두 부부가 동시에 칠복을 가슴에 두고 있다는 것과 금자의 짝으로 맺어 줄 생각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박 선생은 일체를 부인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그 편이 더욱 자연스러울 것 같았고 부인의 정성이라면 충분히 해내고도 남음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두 아이가 고운사랑을 하며 곱게 커주기를 바라고 또 바램하며 두 부부는 양구의 첫날밤의 추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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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80회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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