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망국의 설움
27. 곤도의 애첩
“하이 채오기상 어서 오십시오”
이미 전통을 받은 나까무라의 부인은 대문 앞에서 서성이며 채옥을 기다리다가 채옥을 맞이했다. 채옥의 미모는 부인의 눈이 번쩍 뜨일 정도였다. 어눌한 발음으로 한국어로 정중히 맞이하는 나까무라의 부인 앞에서 채옥은 당황했다. 기모노를 입고 게다를 신은 나까무라의 부인은 작달막한 키에 오동통해 보였고 안경을 쓰고 있는 눈은 차갑게 느껴지나 이지적인 분위기로 오히려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 마땅해 보였다. 나까무라 부인은 남편 나까무라에게 단단히 다짐을 받은듯 채옥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하여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는 눈치였다.
“처음 뵙것서유. 지는 박채옥이라고 혀유” 채옥은 90도 각도로 깊숙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나까무라 부인의 인사에 얼떨결에 깊숙이 허리를 굽혀 답례인사를 했다.
채옥은 지금까지 일본인의 집을 가까이에서 본적이 없었다. 일본인의 집은 목조건물에 다락방이 있는 이층구조였으며 기둥 맨 아래에서부터 판자를 덧대어 올라가는 엇박자 판벽의 특징을 가졌다. 이는 벽에 부딪치는 비나 눈이 자연적으로 흘러내리도록 설계된 과학적인 구조였는데 그 위에 타마구로 불리는 원유를 입혀 비나 눈의 수분이 침착하지 못하고 굴러 내리게 되어 있다. 원유가 입혀진 칙칙한 까만색의 나무집. 가까이에 가면 기름 냄새가 짙게 나곤 했는데 그 냄새로 인해서인지 그 많은 모기와 파리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원유가 발린 나무는 휘어짐이나 뒤틀림이 없었고 흰개미 등의 해충이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에도 그만이었다.
채옥은 처음으로 보게 된 일본인의 집안 어리둥절하기도 했으나 불안함에 온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 되어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건성으로 눈길을 돌렸고 물어 오는 말에는 무의식적인 반향으로 대꾸를 하는 정도로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무언가 불행의 그림자가 자신을 향하여 손길을 뻗어 오고 있는 듯 한데 그 정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채옥은 눈을 감고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사지를 떨었다.
“체오기상 이것 본토 양과라 맛있어요. 많이 먹어요.”
“아녀유 지는 괜찮아유 이런 거 못 먹어 봐서 먹는 줄 몰라유”
얼굴까지 빨개지며 도리질을 하는 채옥을 보며 나까무라의 아내 쇼오메는 채옥이 숫처녀임을 갈파했다. 찰나에 가슴에 서늘한 삭풍이 지나갔다. 그 삭풍은 채옥이 오늘밤에 겪어야 할 일을 예감하고 있는 것이며 그 예감과 함께 한 사람이 둥실 떠올랐다. 쇼오메의 가슴에 통증이 일고 싸아하고 칼칼해진 마음 뒤편에는 언제나 그 사람의 잔영이 있었다.
쓰. 끼. 야. 마
쇼오메가 순결을 바친 첫사랑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다녔던 여학교의 음악 선생님으로 결혼한지 채 1년이 안 되는 신혼의 남성이었다. 쇼오메가 고등학교 2학년 봄학기에 그는 음악교사로 발령을 받아 음악실에서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쓰끼야마 선생을 처음 본 순간부터 쇼오메는 가슴앓이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빨갛게 달궈진 쇠가 내려치는 쇠망치에 두들겨지며 담금질 당하듯 쇼오메의 순결한 가슴은 풀무불 속에 던져진 쇳덩이와 같았다. 가슴에 불덩어리가 일어나 사모하는 마음이 절정에 이를 때면 이미 결혼을 한 유부남이라는 사실에 찬물에 식혀지는 달궈진 쇠붙이처럼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졌으나 그것도 그 때 뿐, 스끼야마 선생을 보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듯 더욱 더 뜨겁게 불타오르는 사모의 정염은 더해만 갔다.
쇼오메는 명문여고인 도쿄죠가칸(東京女學館) 고등학교에 다녔다. 도쿄에 소재하고 있는 도쿄죠가칸은 메이지 21년 설립되어 일본의 명문여고로 상당한 이름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 여고로 정평이 나 있는 고등학교로 일정 이상의 수준이 있는 가문이 되어야 했다. 과연 명문여고답게 교사들도 상당한 실력이 있는 교사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유학파들도 상당했다. 쇼오메는 독일의 쾰른 음대 출신인 스끼야마 선생을 모질게 사모하고 있었다.
쓰끼야마 선생의 손끝이 피아노의 건반을 스치기만 해도 음악이 나왔고 그 음악은 영상화되어 한편의 로맨틱한 영화를 가슴 속에 만들어냈다. 그것은 선생이 건반을 두드리는 강약의 정도에 비례하며 때론 가슴을 간지럽게 하는 속삭임으로, 가슴이 철렁하는 입맞춤으로 때론 격정의 몸부림과 이어지는 환희로, 때론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슬픔과 절망의 늪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그리움에 몸부림치는 밤과 하늘 아래 존재의 가치마저 빛을 잃은 무기력한 낮을 만들어내고 철저히 황폐화시키곤 난 뒤에야 그제야 손놀림을 멈추었다. 손놀림이 멈추니 시간도 멈추었고 사물도 멈추었고 다 정지되고 말았다. 황량한 들판에 벌거벗은 채 홀로 남아 텅 빈 동공으로 먹장구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쓰끼야마 선생의 손은 여자의 손보다 더 가늘고 섬세했으며 아름다웠다. 섬세한 손길로 피아노의 흰건반을 춤을 추듯 달리며 두드리는 모습과 눈을 지그시 감고 감미로운 선율에 몸을 떠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도무지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그가 눈을 지그시 감고 피아노를 칠 때에는 대리석을 같이 깎아 조각해 놓은 듯 섬세한 얼굴에 까맣고 짙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쇼오메는 선생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릴 때면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도 휘청휘청 중심을 잃었다. 쇼오메는 쓰끼야마 선생의 열 개의 손가락에서 만들어지는 피아노의 선율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가고 있었다.
쓰끼야마 선생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환희”를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 했다. 열정적으로 피아노 건반 위에서 춤을 추는 열 개의 손가락 끝에서는 언제나 환영을 몰고 왔다. 그 환영은 피아노 음률의 높낮이에 따라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졌으며 비를 몰고 왔다.
하늘이 노했는지 우박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 허둥거리는 두 남녀가 있구나. 두 남녀는 비를 피해 겨우 찾아낸 비어있는 헛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들어가고 문을 닫는다. 뒤이어 숨을 멈추듯 잦아드는 피아니시모의 여린 음색은 두 남녀가 격정의 순간을 앞에 두고 숨고르기를 하는 것만 같아 한숨이 터져 나온다.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서서히 포르테시모로 달려가며 격정의 시간을 연출해 낸다. 그리고 또 다시 잦아드는 음률과 중간에 뚝 뚝 끊어지는 묵음은 금지된 사랑의 연출이리라. 그것은 쓰디 쓴 이별의 전주곡이었으며 비련의 서곡이었다. 마치 강물이 고요히 흐르고 있는 듯 힘없이 늘어지면서 이어지고 있는 듯 곡조는 시련의 아픔과 진한 그리움 속에서 열병을 앓고 있는 쇼오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내고 있는 듯 아프다 못해 저리고 아렸다. 그 헛간의 주인공은 언제나 쇼오메 자신과 쓰끼야마 선생이었다.
사춘기를 넘기고 이제 자리를 잡아가는 쇼오메의 감성은 아직 여리기만 했고 저 멀리 동경하는 그림 같은 사랑에 대한 환상은 풍부한 감정과 다소 수줍으면서도 감추어져 있는 불같은 열정을 만들어내고는 아직은 수면아래 잠복해 있었다. 잠복해 있던 쇼오메의 감성은 쓰끼야마로 인해 이글거리며 요동을 치기 시작했고 마침내 분출구를 찾아 거센 기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쇼오메는 눈을 떴다. 격정적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던 선생의 손은 이제 막 정지되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쓰끼야마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선생님과 둘만 있다면, 용기를 내서 선생님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을 정성껏 닦아 드리고 싶다. 아니 자신의 혀로 핥아 달라고 해도 기꺼이 그리 할 수 있겠다. 쇼오메는 자신의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먼발치에서 애를 태웠다. 피아노 위에는 젖은 물수건이 놓여 있다.
훤칠한 키에 핸섬한 선생의 얼굴은 턱의 선이 조각과 같이 각을 이루고 있어 옆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애간장이 녹았다. 선생은 가끔 이태리어로 “오 솔레미오”와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애창했다. 그의 붉은 입술에서 “오 솔레미오”가 불려지면 학생들은 넋을 잃었다. 머리는 공회전을 했고 손과 발에서는 땀이 났다. 열창하는 고음 부분에서는 등줄기에 전율이 흘렀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현기증이 일었다. 그는 악마였다.
피아노앞에 앉아 있는 선생의 얼굴만 보아도 좋았다. 하지만 단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이윽히 보아 주었으면 좋겠다. 단 한 번만, “쇼오메야 휴지를 줍는구나. 참 착하고 이쁘구나” 하는 소리를 들었으면 한이 없겠다. 쇼오메는 한숨을 깊이 내어 쉬었다. 나 같은 것을 선생님이 봐주시겠나 하는 자조였다. 부지런하고 착한 학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새벽부터 일찍 등교하여 운동장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딱 한 번만이라도 선생님의 곁에서 선생님의 냄새를 찬찬히 맡을 수만 있다면...
저 멀리 교문을 막 들어서서 운동장으로 걸어오는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쇼오메는 운동장으로 뛰어 나갔다. 괜시리 얼굴이 붉어진 쇼오메는 화단과 화단에서 열 개의 계단 아래에 있는 운동장에 떨어져 있는 휴지가 없는지 살펴보면서 휴지를 주웠다. 함부로 떨어져 있는 휴지 한 조각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쇼오메는 휴지를 줍다 말고 그 자리에 잠시 쪼그려 앉았다. 아무리 해바라기를 해도 눈길 한 번 3초 이상 정지된 눈길을 받아 본적이 없다. 다만 스쳐가는 눈길이었고 그 눈길을 붙잡기 위해 시선을 쫒아도 선생은 뒷모습만 보인채로 쇼오메의 애절한 시선을 허공으로 띄워 버렸다. 그럴수록 쇼오메의 가슴에는 시퍼런 멍이 그대로 남았다.
“쇼오메 아침 일찍부터 운동장에서 휴지를 줍고 있구나. 착하다.”
쪼그려 앉아 있던 쇼오메의 어깨를 살며시 잡아 주며 선생은 깜짝 놀라는 쇼오메의 커진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쇼오메는 중심을 잃고 주저앉을 뻔 했다. 선생은 즉시 반쯤 구부린 자세로 쇼오메와 눈높이를 맞추며 중심을 잃은 쇼오메의 두 어깨를 잡아 주었다. 쇼오메는 선생의 입에서 살짝 전달되어지는 냄새에서 남자의 향취를 느꼈다. 그윽한 미소를 띠고 바라보아 주는 눈길에 고만 정신이 다 아득하고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다. 다리가 풀려 풀썩 주저앉아 버리는 쇼오메를 선생은 반쯤 일으킬 때 쇼오메는 선생의 품에 안겨들었다. 선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며시 안았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등교하던 학급 반장인 치요꼬가 무슨 일인가 해서 뛰어 왔다. 치요꼬는 쇼오메와 쓰끼야마 선생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여인 특유의 육감어린 눈으로 찰나의 상황을 탐색하고 있었으나 눈치로는 판단이 서지 않아 예리한 눈길로 선생의 표정과 쇼오메의 표정을 관찰했다.
“선생님 쇼오메가 현기증이 생긴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양호실에 데려다 주고 오겠습니다.”
“아니 아니 괜찮아 쇼오메가 잠시 현기증이 생긴 모양이야. 치요꼬 걱정 말고 먼저 들어가요. 아무래도 내가 데려다 줘야 하겠다.”
치요꼬는 쇼오메의 안색이 창백해져 있는 것과 중심을 못 잡고 쓰끼야마 선생의 팔에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만 급하지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다.
“쇼오메 내 등에 업히거라.”
스끼야마 선생이 몸을 구부려 쇼오메에게 등을 내어주며 말했다.
“선생님 괜찮습니다.”
치요꼬는 사양하는 쇼오메를 밀어 스끼야마 선생의 등에 업히게 했다. 스끼야마 선생은 쇼오메를 업고 학교 안에 있는 양호실로 달려갔다.
“치요꼬야 교무실에 들러 양호실 열쇄를 달라고 해서 가져 오너라”
“네. 선생님”
양호실은 교무실을 지나서 복도 끝에 위치해 있다. 서둘러 양호실에 눕혀 놓고 스끼야마 선생은 쇼오메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쇼오메야 지금은 좀 어떻니?”
스끼야마 선생이 쇼오메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짚어 보며 깊은 눈동자로 물었다. 스끼야마 선생의 숨소리가 쇼오메의 이마에 따뜻하게 전달되어 왔다. 쇼오메는 스끼야먀 선생의 체취와 함께 전달되어지는 숨결에 온몸의 힘이 땅바닥으로 빠져 나가는 듯 현기증을 느끼며 요동하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괜찮아요. 선생님”
간신히 눈을 뜨면서 쇼오메는 입술을 달싹이듯 가냘픈 음성으로 대답했다. 스끼야마 선생은 누워 있는 쇼오메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살며시 안아 주었다. 쇼오메는 스끼야마 선생의 가슴에 안긴 잠시 동안 숨이 막히며 온몸의 피가 시트 속으로 빠져 나가는 듯 현기증을 느끼며 비에 맞은 병아리처럼 달달 떨었다. 선생은 쇼오메를 풀어 주며 말했다.
“쇼오메야 잠시 쉬면 나을거다. 수업 잘 받고 집에 가면 푹 쉬거라. 나는 수업에 들어가야 해. 우리 공주님 안녕.”
비가 내렸다. 쇼오메는 우산을 쓰고 가슴에는 소담스럽게 피어 있는 붉은 장미를 한 아름 안고 학교 옆에 있는 관사를 지나 학교에서 그려온 약도를 보며 골목길로 들어섰다. 골목 담장너머에는 후박나무의 반쯤 펼친 부채 같이 펼쳐져 있는 짙은 녹색의 잎이 산뜻하고 싱그럽다. 흰 브라우스에 병아리색 스커트를 받쳐 입은 쇼오메의 코를 스치는 나뭇잎에서 굴러 떨어지는 빗방울의 내음과 약간 비린듯하면서도 싱그러운 녹색의 향기가 감미롭다.
골목이 다하는 길, 막다른 길에 하얀색 대문집이 보였다. 벌써부터 가슴이 요동치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 수업을 받으면서도 자꾸 눈이 감기고 눈이 감기면 스끼야마 선생의 품에 안겼던 장면이 떠오른다.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는 해야 해. 그게 제자 된 도리야”
쇼오메는 스끼야마 선생의 집을 향해 가는 동안 내내 입으로 되뇌였다.
대문을 열어 주면서 얼떨떨해하면서도 반가이 맞아 주는 스끼야마 선생의 뒤를 따라 집안에 들어섰다. 실내의 풍경은 여늬 집과 달리 서구풍으로 꾸며져 있었다. 다다미 위에는 소파가 놓여 있었고 자개 문갑 위에 올려놓은 멋있는 축음기는 외국에서 들여 온 것이 분명하다. 도자기로 만든 화려한 전등은 소파 옆 좌탁 위에 올려 있는데 처음 보는 화려한 예술품인 듯 싶다. 그리 넓지 않은 거실 중앙에서 조금 구석 쪽으로 몰렸으나 벽과는 간격을 많이 띄운 피아노는 거실 전체를 꽉 채운듯 상당한 볼륨감으로 집전체의 분위기를 꽉 차게 만드는 느낌을 주었다.
“비 오는데 오느라 고생 많았다. 몸은 다 나았니? 이것부터 마셔라”
선생은 쇼오메가 앉아 있는 소파의 탁자에 따뜻한 홍차를 내려놓으며 자기도 자리에 앉았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살펴 주셔서 나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앉은 자세에서 꾸뻑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사모님은?”
쇼오메는 사모님이 보이지 않아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드리지 못한다는 서운함을 표정으로 나타내며 물었다.
“응 집사람은 친정에 갔단다. 내일이나 되어야 올 수 있어. 쇼오메가 인사를 드리고 싶어 하는데 안 되었구나”
쇼오메는 사모님이 친정에 갔다는 말을 듣고 입으로는 “네에”하고 다소 실망스러운 듯 답례를 했으나 이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저절로 마른침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려는 듯 생침이 고여 왔다. 쇼오메는 홍차를 마시며 고인 침을 삼켰다.
“선생님 그럼 제가 저녁을 해 드리고 가도 좋을까요?” 머뭇거리며 쇼오메가 용기를 내어 선생의 반응을 살폈다.
“그래 줄래? 나도 혼자서 밥을 먹으려니 쓸쓸하던 참이다. 쇼오메가 만들어 준다면 좋은 일이지. 늦게 가도 괜찮으니?”
선생은 쇼오메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선생의 얼굴과 쇼오메의 얼굴이 가깝다. 쇼오메의 얼굴이 빨개졌다. 쇼오메는 빨개진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떨구며 홍차를 들어 입에 댔다. 혹시나 선생의 팔이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지지 않을까 두려워져 입술을 꽈악 물었다. 도톰한 입술이 앵두처럼 붉어지며 입술선이 분명해졌다.
“괜찮아요. 선생님”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에 선생은 이것저것 챙겨주다 쇼오메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선생은 쇼오메를 가슴에 품었다. 쇼오메는 손에 묻어 있는 물기를 어쩌지 못하고 멈칫하다 용기를 내어 선생의 등을 힘주어 안았다. 눈을 꼬옥 감았다. 선생의 입술이 쇼오메의 숨결을 앗아갔다. 가슴이 콩딱거리며 심장의 고동이 머리끝까지 전달되어져 왔을 때 선생은 쇼오메를 번쩍 안아 침대에 눕혔다.
“아아아아”
짧은 시간과 긴 시간이 겹쳐 왔다.
쇼오메의 첫 남자가 된 선생은 쇼오메의 심장에 박혔고 쇼오메는 스끼야마 선생을 떠올릴 때면 선생의 손길하나 하나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의 손짓에 따라 반응했던 자신의 몸짓 하나 까지도 세세히 떠올랐다.
채옥을 보는 쇼오메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쇼오메는 채옥의 목욕을 도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본인이 좋아 하는 향품을 써서 치장을 해 주고 기모노를 내어 놓았다.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나갈 무렵 문 앞에서 경적소리가 나며 자동차가 정지했다. 쇼오메는 서둘러 마중을 나갔다. 채옥은 홀로 남겨진 생소한 다다미방에 기모노를 입고 불안한 심사를 억눌렀다.
“어서 오세요.”
쇼오메의 마중을 받으며 나까무라는 곤도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곤도는 쇼오메에게 군모를 벗고 인사를 하며 집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식사를 마친 뒤 곤도와 채옥은 2층 방으로 인도되었다. 2층 방에는 침구가 가지런히 깔려 있었고 방 가운데에는 주안상이 소담스럽게 차려져 있다. 채옥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벌벌 떨리던 몸은 주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고 본능적인 예감과 함께 절망감으로 머릿속이 훵하니 구멍이 난 듯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눈앞이 노래지며 끈질기게 자신의 의식을 붙잡고 있던 우연이라는 말과 아무 일도 없었으면 하는 바람은 주안상이 차려져 있는 방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여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그리고 앞날에 대하여 체념이 일었다. 하라는 대로 했다.
곤도의 손길이 온몸을 파고들어 애무할 때에는 곤도의 손길이 스쳐가는 곳마다 소름이 돋았고 근육은 긴장으로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그녀의 몸의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곤도의 마지막 동작에는 온몸의 힘이 한곳으로 모아졌다. 자신의 몸에 이물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본능은 위기를 감지하고 전신의 근육을 경직시켜 온몸으로 저항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혀 폐부가 요동을 치며 저항하는 동안 심장의 박동은 높아졌다. 숨이 막혀 아찔한 순간에 마침내 깊은 숨을 토해냈다. 다시 깊은 숨을 들이키는 순간, 곤도의 몸이 파고 들어왔다. 그것이 깊이 들어와 자신의 몸을 가득 채워지는 짧은 순간까지 채옥의 본능은 온힘을 다하여 밀어내고 있었고 숨은 멈추었다. 다시 숨을 쉬는 순간 온몸의 힘은 지면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사지는 늘어졌다.
파과의 아픔이 몰려 올 때는 이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며 간헐적으로 몰아치는 아픔을 어금니를 앙다물고 막아냈다. 파과의 아픔이 계속되는 동안 이상하게 머릿속은 정돈이 되어졌다. 앞날에 대한 생각도 떠올랐다. 그래도 계급이 높은 사람이니 오빠에게는 잘 해주리라는 생각과 어쩌면 부모님께도 잘 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생겼다. 그토록 부들거리며 심장이 멎을 듯 했던 공포와 불안감과 절망감도 사라져 버렸다. 더 이상 잃을게 없다는 자조와 체념으로 채옥은 곤도의 몸을 자궁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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