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세월
32. 세월
“칠복이 일어난겨? 오날은 우리 집 굴뚝을 좀 봐 주었으면 좋것는디”
“야 일어났슈. 지가 밥 먹고 가서 봐 드리것슈.”
박 서방의 말에 방문을 열고 나온 칠복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급히 꿰어 입은 바지의 허리춤을 추스렸다. 허리띠라고 해 봐야 철지난지 오랜 빨간색 넥타이인데 미끌거리는 통에 여간 졸라매지 않으면 풀리는지라 꽤나 신경이 쓰이곤 했다. 며칠 전에는 최 주사 댁 지붕을 고치려고 사다리를 오르는 중에 허리띠가 풀려 낭패를 봤다. 일할 때마다 입는 이 옷은 흠박진 헌쓰봉인지라 본래의 색은 바랜지 오래되었고 샅과 무릎은 기웠는데 엉덩이 쪽에는 벌써 직조된 천의 날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쪽도 얼마 못가 터질 것 같은데 마땅히 헌 바지에 덧댈만한 양복천이 없다. 하여 뻘쭘하고 부자유스러운 몸짓이 만들어진다. 어지간히 엉덩이 쪽에 신경이 쓰인다.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매어도 뱃구레가 없어서 그런지 배가 꺼지면 미끌미끌한 넥타이 허리띠의 매듭이 풀리기 일쑤다. 가끔 넝쿨이나 나무껍질을 벗겨서 야물게 허리를 묶어도 보았다. 하지만 약간 곰곰한 냄새가 나는 부침개를 먹고 얼마 후에 창자가 요동질을 치는 바람에 급히 뒷간에 가서 허리띠를 풀다가 단단히 낭패를 본 적이 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에는 어찌 되었던지 넥타이 허리띠를 매고 다니는데 자주 풀리는 일은 있어도 안 풀려서 낭패를 본 적은 없다.
박 서방이 돌아가고 난 뒤에 칠복은 방문을 열고 성큼 방안에 들어서며 문고리를 당겨 문을 닫고 방바닥에 앉았다. 문을 닫는 동안 잠시 코를 자극하는 퀴퀴한 홀아비 냄새에 머뭇했으나 어쩌겠나. 벌써 40고개를 바라보는 36이다. 이 나이인데 아직도 장가를 들지 못했다. 휘휘 방안을 둘러보니 살림살이 꼬락서니에 보는 대로 이내 한숨이 터져 나온다. 읍내에 나가 맞춰 입은 양복은 5년이나 지났지만 몇 번 입어 보지도 못한 채 옷걸이에 걸려 있다. 양복 위에는 먼지가 앉지 말라고 신문지로 덮었으나 신문지 위에는 벌써 먼지가 수복하다. 친구들은 벌써 학부형이 되어 있다. 좀 빠른 친구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저 보다 큰 아들을 둔 친구가 둘이나 된다. 아버지보다 키가 큰 아들을 대동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부러움이 반이고 자신의 꼬락서니가 워낙 사나워 보이니 한숨이 반이다.
1966년 16살이 되던 해의 5월 하순 그러니까 여름이라고는 이르고 봄이라고는 해도 깊숙한 봄이니 여름에 들어서는 문턱쯤 되는 때에 박 초시를 따라 이 마을에 들어와 박 초시 댁의 머슴살이를 시작으로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사랑하는 이들을 많이 잃었다. 가슴에는 한이라는 괴물이 서리서리 한 발 택이나 넘게 또아리를 틀고 있다.
"휴우~~"
한숨 사이로 세월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아릿한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그대로 설움이 되고 비릿한 슬픔이 되고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있구나. 천장이 보인다. 천장을 보니 까맣게 그을린 서까래에 덕지덕지 입힌 신문지가 너덜거리며 간신히 붙어 있다. 언제부터 눈에 거슬리던 것인데 아직 손을 못 보았다.
머슴살이 10동안 받은 세경은 박 초시가 고이 간직해 두었다가 기름진 논 다섯 마지기를 사 주었다. 하지만 은인인 박 초시의 집이 빚에 넘어갈 때에 그 논을 팔아 절반을 내어 놓았다. 그 남은 절반으로 서울 살림을 떠나는 김 서방 네로부터 반 강제로 오막살이 같은 이 집과 딸려 있는 논 세 마지기와 밭뙈기를 떠안았다. 김 서방 네가 떠나니 빈집이 되었는데 마땅히 살림을 낼 데도 없어 별수 없이 대충 신문지로 도배를 하고 들어와 산지도 벌써 7년 세월이 흘렀다. 내 집이니 누가 나가라 마라 하지 않아 심간은 편했다.
동숙이 사고로 죽고 난 뒤에 어디론지 떠나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들같이 생각하며 의지해 주었던 박 초시 부부의 애절한 눈물의 애원은 칠복의 발걸음을 단단히 붙들어 맸다. 뒤이어 대주마님이 돌아가셨다. 뗏장같이 짱짱했던 박 초시는 대전에서 사업을 하던 사위의 빚보증으로 집과 문중 땅까지 내어 주었으나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다. 사위가 구속되고 빚보증으로 집과 문중 땅까지 경매에 붙여지자 극심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뇌출혈로 쓰러졌다. 박 초시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칠복의 손을 꽉 잡고 우리 집을 부탁해 우리 집을 부탁해 하는 유언을 남겼다. 그것으로 박 초시 댁의 머슴살이는 14년 만에 자동적으로 끝이 났다.
그 동안 박 초시 부인은 종숙이와 결혼을 간절히 부탁했으나 칠복은 동숙이 죽고 난 뒤 얼마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실성하기까지 했다. 종숙은 이 꼴을 보고 실망한 나머지 친구를 통해 선을 본 남자에게 갔다. 한사코 말리는 박 초시 부인의 손을 떨쳐내고 그 남자를 따라갔다. 부인은 가산을 정돈하여 구속된 사위를 구출해 주고 함께 살자고 애원하는 둘째 딸 부부의 집으로 들어갔다.
칠복의 나이 30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남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살았다. 떠나야지, 떠나야지 하면서도 이 땅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은인인 박 초시 어른의 묘지가 있기 때문이며, 마땅히 어디에 가서 하늘을 이고 지며 살 만한 붙박이 피붙이도 자신이 기댈만한 지인도 없어 차일피일하다 그대로 눌러 앉아 살고 있는 중이다.
친구들은 이런 칠복을 보고 칠뜨기라 불렀다. 자신이 보아도 몰골이 영락없는 칠뜨기인데 칠뜨기라고 부른들 대수인가. 하루하루가 지나고 휘적휘적 내일이 다가온다.
아아 동숙아.
칠복은 반닫이를 열고 깊숙이 넣어 두었던 무명천을 꺼내 손에 쥐었다. 동숙이와 치룬 초야에 동숙이 칠복이 몰래 뒤처리를 할 때 썼던 무명천이었다. 칠복이 무명천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동숙이가 죽고 난 며칠 뒤였다. 동숙이 어머니가 칠복을 불러 동숙이가 애지중지하던 증표였다고 이 무명천을 꺼내 주었다. 자신이 시킨 일이라고 했다. 혹여 나중에 부부싸움이라도 할 일이 생기면 이 무명천이 굉장한 무기가 될 것이니 보물처럼 잘 간직하고 있으라고 시킨 일이라 했다. 동숙이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칠복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작정을 하고 칠복과의 잠자리까지도 허용해준 마님이었다.
마침내 동숙이 용기를 내어 칠복의 방에 숨어들었을 때, 방문 밖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했다. 다음날 슬며시 동숙을 불러 무명천을 확인하고 장농 깊은 곳에 감추어 두고 신주단지 모시듯 하게 했다. 동숙은 이것이 빌미가 되어 어머니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찍소리 못하고 들어 드리곤 했다. 가끔씩 무명천을 꺼내 쓸어 보고 냄새도 콩콩 맡아 보면서 가슴에 꼭 껴안는 모습을 들키곤 했다. 마님은 무명천을 전해 주며 자신은 죽어도 할 수 없으니 칠복이 손으로 태워 버리라고 울면서 전해 주었다.
넋을 놓고 산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눈이 있어 보고 다니고 코가 있어 숨을 쉬고 다니고 입이 있어 먹고 다녔다. 그 세월이 얼마런가. 칠복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질끈 감은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려 무명천을 적셨다. 퇴색되어 누런색으로 변한 무명천에는 아직 희미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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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80회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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