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동짓달 긴긴 밤
28. 동짓달 긴긴 밤
눈을 뜨기가 겁난다. 자고 일어나면 눈이 수북히 쌓이니 눈 치우느라 칠복이 골병이 다 들었다. 간밤에는 동짓날이라 팥죽을 옹심이를 넣은 팟죽을 한 그릇 먹지 않았느냐. 달달한 팟죽에 동치미를 꺼내 냠냠하게 먹었다. 살폿 잠이 들었을까 창밖에 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듯 하다. 또 눈이 오나 하고 입맛을 다시다 고대로 잠이 들었다.
겨울이 되니 할일이 태산 같이 늘었다. 낱가리를 둥이고 땔감 나무를 쟁이고 고구마 퉁가리를 동여 놓고, 배추 무우는 종이에 싸서 마당 한켠에 구멍을 뚫고 쟁여 놓고 짚으로 마개를 해서 박아 넣었다. 감나무 아래에는 김장독을 큰거로 두개나 묻고 그 옆에 동치미 항아리며 총각김치 항아리에 백김치 항아리까지 묻었다. 장독은 짚으로 꽁꽁 싸매 놓았지 어미소는 임신 중인데 송아지 한 마리가 딸렸다. 송아지 등에 짚으로 엮은 조끼를 입혀 놓았다.
감나무에서 거둔 뾰족감은 광안에 있는 항아리에 모셔 놓고, 대주마님과 박초시가 촐촐할 때 야금야금 꺼내 홀홀 빨아 먹었다. 그 옆에는 곶감을 잔뜩 만들어 놓았다. 추수 후에 거두어 동지전에 팔려 나간 나락만 수십섬이며 광에 남아 있는 나락도 수십섬인데 일부는 아예 정미소 창고에 맡겨 두었다. 넓은 광인데도 발을 디디기도 힘들 정도로 와글와글 가득 차 있다. 일일이 사람 손으로 하는 일인데 놉을 주고 일꾼을 사서 썼으나 저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죄다 칠복이 손을 거쳤다. 손에 물집이 잡히고 몸살을 몇번씩이나 앓으면서 그 일을 다 해냈다.
가을 내내 독구는 깨갱 깨갱, 험난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 감나무에서 땡감이 툭툭 떨어져 독구의 머리를 몇번씩이나 뇌뱅였다. 거기에 옆집에서 뻗어 나온 밤나무의 가지가 번성하여 밤을 많이 매달았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독구집 위에 떨어지곤 했다. 독구는 똥 누느라고 힘을 주다가 떨어지는 밤송이에 몇 번이나 얻어 터지고는 밤나무 주변에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쪽으로는 땡감이 저쪽으로는 밤송이가 독구를 노리고 번갈아 떨어지며 독구의 애간장을 녹였다. 집을 옮겨 주려고 해도 마땅히 옮길 곳이 없었다. 외양간 앞으로 옮길 수도 없고 거름 두엄 옆으로 옮길 수도 없고 닭장 옆으로 옮겨 줄 수도 없다. 옮겨 봤자 사방으로 감나무요 밤나무다. 하여 독구는 매일 밤 집 위로 떨어지는 땡감들과 밤송이에 놀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낑낑 울다가 잠이 들었다.
해가 짧아지니 긴긴밤을 어찌 보낼까. 칠복은 머슴이라는 신분까지 더해 아직 동무가 없었다. 하긴 하루에 한번은 꼭 들러야 하는 옆집 금자가 있고 동숙이가 옆구리에 차고 있는데 마실을 가고 말고 할 짬도 없다.
“오빠 출출하지? 고구마 먹어”
일을 마쳐 놓고 잠들기 전에 책을 펴 놓고 공부하고 있으면 동숙이 고구마를 쪄서 동치미와 함께 소쿠리에 담아 내왔다. 그리고는 댓돌 위에 서서는 이불 속에 손을 넣어 서 따뜻한지 어쩐지 확인해 보고 나서야 돌아섰다. 그 살펴봄이 꼭 마눌같다.
어제는 손을 넣어 보고는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이랬다. “아이 따숩다. 나도 여기서 자고 시프다”. 못 들은 척 했다. 말을 내 놓고는 아차차 입을 가리더니 칠복이 눈치를 살짝 훔쳐 보고는 동숙이 꽁지가 빠져라 내뺐다. 툭하고 나온 말인데 말이 되어 나오고 나니 얼굴이 화끈거려서 뒷감당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뭐가 캥기는지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면서 무얼 캐내려는 눈치를 보였다. 아마 어제 자기가 했던 말을 정말로 안 들은 건지 듣고도 시치미를 뚝 따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나보다. 칠복은 시종 시치미를 떼어 동숙이 속을 들었다 놨다 했다.
아침이 되니 흰눈이 내려 있다. 까마귀가 물찌똥을 갈기고 간 것처럼 눈이 왔구나 싶은 정도인데 신발이 빠지지 않을 만큼 눈이 왔다 갔다. 비질을 할까 말까 망설일 정도의 눈인데 그래도 싸리비를 들었다.
먼저 우물가부터 시작해서 금자네 집 앞을 거쳐 골목길 어귀까지 쓸었더니 이마에 송글하고 땀이 맺힌다. 올라 오는 길에 마침 물을 길러 가는 금자 어머니와 금자가 칠복을 보고 반긴다.
“부지런도 해라. 벌써 눈을 다 치운겨?”
“야 금자 엄니 간밤에 평안하셨슈”
“칠복아 앞에 금자는 빼고 그냥 어머니라고 부르라니께”
짐짓 흘긴 눈으로 칠복에게 정을 주는 금자 어머니, 살포시 뺨을 붉히는 금자. 아침 기분이 상쾌하고 즐겁다.
“애고 아녀유 아녀유 지가 감히…”
“칠복아 이따가 시간 나면 우리 집에 놀러 오너라. 점심 같이 먹게”
“야 그러것슈”
금자가 빼꼼히 칠복의 눈을 보면서 확인 도장을 받는다. 칠복이 입을 꾹 다물고 인사를 꾸뻑 하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두레박을 내렸다.
“어흠 상구 눈을 다 치웠더냐”
“야 어르신. 잘 주무셨어유”
마당에 나와 세수를 하던 박 초시가 들어서는 칠복을 보며 흐뭇한 얼굴로 반긴다.
“그래 애썼구나 어서 씻고 밥 먹어라”
“야”
종숙이 수건을 받쳐 들고 서 있다가 수건을 건넨다. 박 초시는 대야에 담긴 물을 쏟고는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고 들어갔다. 종숙이가 칠복이를 보며 안절부절하는 눈치를 보인다. 종숙이는 칠복이가 있을 때에는 아무리 급해도 변소에 들고 나지를 못했다. 동숙이는 변소에서 나오다가 칠복이와 정통으로 마주치면 메롱하고 혀를 쏙 내밀고는 허둥지둥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어제도 그랬다. 칠복이가 밖에서 일을 보고 들어 와서 변소 앞에 있는 닭장에 혹시 쥐가 갉아서 생긴 구멍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살펴 보려고 가는데 마침 변소에서 나오던 동숙이와 딱하고 마주쳤다. 동숙이는 변소 안이 갑갑하여 일을 보고 난 뒤에는 빤쓰만 올리고 치마나 바지는 변소 밖에서 마무리를 짓는 습관이 있었다. 이 날도 아직 바지를 추스르지 못하고 나오던 중에 칠복이와 딱 마주쳤다. 찔끔하면서 바지를 추스리고는 메롱하고 혀를 쑥 내밀었다가 도로 넣고는 그 틈에 옷 매무새를 고쳤다. 그러면 뭘하나. 칠복이가 이미 하얀 빤쓰를 봤는데 말이지.
정지에 있던 동숙이 한 바가지의 뜨거운 물을 퍼서 대야에 부었다.
“오빠 잘 잤지. 어서 씻어”
“아녀 나는 나중에 씻을께”
“죄자 씻구 오빠만 남은겨 긍게 빨랑 씻어”
“그려어? 그려 고마워”
눈치를 살피는데 종숙이 하품을 하다가 칠복의 눈에 딱 걸렸다. 벌린 입을 급히 닫는 종숙이 눈이 찔끔하다.
“그란디 금자 엄니하고 무슨 말을 했던겨?”
“웅 암말 안 했어. 이따가 점심에 잠시 건너와서 점심 먹자고…”
“그려? 그럼 나도 가야징”
비누칠을 안 해도 되건만 동숙이 칠복의 손에 억지로 미제비누를 쓱싹하고 발라 주어 비누칠을 한 눈에 비눗물이 들어갔나 보다. 꿈쩍거리며 눈을 씻어 내는 칠복이 뒤에서 동숙은 뭐를 궁리 중이다.
한참 밥을 먹고 있는데 동숙이가 말했다.
“아부지 도실비 넣은 정구지 적 생각나지요? 먹고 시프다.”
대주마님의 눈이 번쩍한다. 밥으로 가던 수저와 국으로 가던 수저들이 잠시 멈추었다.
“뭐여 도실비 넣은 정구지적? 그게 위디 있는디, 실정구지에 도실비라 에호 입맛 돋는다”
어지간해서는 먹거리에 대해 말씀이 없던 대주마님의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대번에 박 초시의 엉덩이가 들썩한다.
“엄니 자시고 싶으셔유? 오늘 영동장이니께 지가 알아 볼께유”
연세도 있으려니와 감기를 앓고 나서는 자시는 것이 시원치 않아 걱정이 되던 차이다. 섭생이 허하면 언제 숨을 놓을지 모를 연세이다. 하여 찬거리에도 신경을 쓰면서 이것 저것 좋은 것으로 상을 올렸다. 구하기 어려운 귀한 찬거리는 연지의 손을 통해 공수 받았다. 지난 번에는 손바닥 만한 전복을 구해 놓았다고 하면서 박 초시의 손에 들려 주었다. 그것으로 죽을 쑤어 드리는 날, 대주 마님이 고집을 부려 온 가족이 전복죽을 한솥 가득 끓여 입가심을 한 적도 있었다. 참기름을 달달 뿌려서 볶고 거기에 불린 쌀을 넣었다. 국물로는 전복껍대기를 넣고 오랫동안 끓인 국물을 넣어 끓였다. 끓여진 전복죽은 입에 넣으면서 특유의 향기에 취하고 입에 들어가자 마자 혀를 감돌고 녹아 들었다. 고기 근수로 따져 보아도 한근택은 됨직한 엄청난 전복이었다. 대주마님은 아들 덕에 호사를 했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올갱이 정구지적을 자시고 싶으시단다. 이 겨울에 추워서 다 얼어죽게 생긴 판에 올갱이를 어디에서 구하나.
지난 번 영동장에서 박 초시는 우시장 저편으로 난장을 편 곳에서 함지박에 담겨 있는 우렁이와 도실비를 본 기억이 났다. 상을 물리고 난 뒤에 교환을 불러 연지에게 연락을 취했다. 올갱이 이야기를 하니 걱정하시지 말고 출입해 달란다. 걱정을 하니 자신이 금강에 들어가서라도 잡아 대령하겠노라고 자신이 만만하다. 느긋한 마음으로 외출 준비를 하면서 택시를 불러 놨다. 이참저참 엉덩이가 들썩 거리던 판국인데 잘 되었다 싶다. 서둘러야겠다. 대주마님은 올갱이적 이야기가 나오자 마자 수저를 놓으셨으니 점심 전에 돌아와야겠다.
일이 커져 버렸다. 올갱이적을 부쳐 먹자는 말을 내어 놓으면 돼지 고기를 듬성듬성 썰어 넣은 김치적을 부쳐 먹자고 하실 줄 알고 내어 놓았던 말이었다. 단순명료하게 칠복이가 금자네 집에 못 가도록 수를 쓴다는 것이 이모양이 되어 버렸다. 아무렴 칠복이 혼자 초대했다는데 그 자리에 어찌 쭐레쭐레 따라갈 수 있겠나. 궁리끝에 내어 놓은 일거리였다. 그런데 그만 일이 커져 버렸다. 수습이 안 된다. 동숙은 눈을 질끈 감고 머리에서 땡땡 소리가 나도록 돌렸다. 그래도 별 수가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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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80회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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