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힘내요. 파이팅
36. 힘내요. 파이팅
"저기요 선생님, 이제는 아가씨, 아가씨 하고 부르지 말고 선영아 하고 불러 주세요. 그래야 편해요."
선영이 짐짓 토라진 음성으로 칠복에게 말했다. 이 집에 출입한지도 어느덧 열흘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숫기가 없는 칠복이가 마땅히 부를 명칭도 딱히 없고 하여 집안 식구들이 하는 대로 아가씨, 아가씨 하고 불렀는데, 그게 못 마땅했던 모양이다. 정색을 하고 말했다. 머쓱해진 칠복이 무슨 의미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선영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제가 많이 의지하고 있어요. 아빠는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라면 집에 들여서 곁에 두면 어떻겠느냐고 하시지만 아빠 생각과 제 생각은 달라요. 아직 말씀 드릴 때가 아닌 것 같아서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하여튼 아빠의 생각과 제 생각은 달라요. 제게는 마치 오빠와 같이 친근하게 생각되어지고 있어요."
"고마운 말이지만 그래도 어디 신분이 다르고 처지가 다른데 저 같은 사람을 어찌 의지한다고 하시유. 감당하기 어려운 말이유."
선영이 처연한 눈빛으로 칠복을 이윽히 바라보았다. 선영의 시선을 받으며 칠복도 선영의 내심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정면으로 바라본다. 침묵이 흘렀다. 선영이 처연한 눈빛으로 자신의 내심을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칠복은 선영의 시선에서 무언가 모를 애틋함을 느끼고 있다.
"저기 선생님 새벽예배에 데려다 주세요. 함께 예배드리고 싶어요."
"아직 외출하는 것은 무리일텐데 괜찮겠슈?"
"그분의 뜻을 알고 싶어요."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시련이라고 생각하고 맴을 편히 가시셔유. 아가씨"
"어머 또 아가씨."
선영이 이번에는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다. 찬바람이 씽하니 부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방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칠복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작심한 듯 선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선영아 내일부터 새벽기도 가자. 내가 데려다 줄께."
선영이 방긋 웃었다. 그리고는 고맙다는 듯 칠복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선영의 몸에서 환자 특유의 에틸 알콜 냄새와 함께 성숙한 여인의 체취가 풍겨왔다. 칠복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선영의 손을 겹쳐 잡았다. 선영의 뺨에 홍조가 피어오른다.
"그 분의 뜻을 알고 싶어요. 왜 선생님을 제게 보내 주셨는지 그 뜻을 알고 싶어요."
선영의 말에 슬며시 손을 놓은 칠복이 선영의 눈을 바라보았다. 선영은 결단이 필요한 듯 그리고 그것은 창조주의 권위에 의한 응답으로서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선생님 지체하지 않을 겁니다. 망설이지 않을 거예요"
앞도 뒤도 없이 짤막하게 자신의 심정을 말하는 선영의 표정은 단호했다. 입을 꾸욱 말아 다물며 어금니를 힘주어 무는 표정은 여인이 가장 큰 일을 결단할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칠복은 내심으로 전달되는 선영의 결단이 자신과 연관되어 있는 결단이라는 것을 지금 막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입버릇처럼 말한 서울 사장님의 외동딸과 결혼할 것이라고 했던 말을 상기했다. 어쩌자는 것인가.
"선생님 살고 싶어요. 도와 주셔야 해요."
"있는 힘을 다 할께. 수연아"
"고마워요. 선생님"
선영이 머리를 슬며시 칠복의 품에 기댔다. 어깨를 살포시 감싸 주며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다. 앙상한 뼈만 남아 있는 선영의 어깨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다. 선영은 칠복의 품에 더욱 깊숙이 안겨든다.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꼬옥 안아 주었다. 선영의 심장이 박동소리가 칠복의 가슴에 전달되어 왔다. 선영이 슬며시 고개를 들어 칠복의 눈을 맞춘다. 눈을 맞추고 있던 선영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선생님 이러고 잠시 더 있어 주세요. 그리고 제 병이 낫거든 키쓰해 주세요."
"그래 얼마든지 해줄께. 병을 이겨내야 혀. 선영이는 할 수 있어."
칠복의 코와 입을 피해 칠복의 가슴에 대고 선영이 조용히 말했다. 칠복은 선영을 더욱 힘주어 안다가 살짝 힘을 뺐다. 부자연스러운 이 자세가 선영에게 얼마나 힘이 들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기요 잠시 누울께요. 할머니에게 홍차 타다 달라고 해 주세요. 이번에는 위스키 세방울 넣어 주세요."
"알았어. 이번에는 내가 타다 줄께. 선영이 얼굴이 참 이쁘구나. 기운이 펄펄 나는 것 같어"
"어머 좋아라. 그 칭찬 참 오랜만이네요. 엄마가 늘 그렇게 말해 주셨는데..."
선영의 눈가가 빨개진다.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칠복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뭐 필요한게 있어요? 선생님"
소파에 앉아 정원을 내다보고 있던 할멈이 고운 눈으로 칠복을 바라보았다.
"홍차 한 잔 타다 주려구요."
"선생님이 손수? 우리 아가씨는 복도 많아요. 총각 손으로 타 주는 홍차가 얼마나 맛 있을꼬"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 슬며시 멋 적게 웃어 주고는 주방에서 홍차를 탔다. 위스키는 티스푼에 따라 선영의 잔에는 세 방울을 떨어뜨리고 나머지는 자신의 찻잔에 넣었다. 정원에는 하얀 접시꽃과 빨간 접시꽃이 뭉게구름이 피어 올라가듯 피어 있다. 나팔꽃은 장미를 타고 올라가 둥근 계단을 올라가듯 층층으로 보라 꽃을 피워내며 자태를 뽐낸다. 정원에는 푸르름이 가득했다. 이층 계단으로 오르며 칠복은 따끈하게 끓인 홍차에서 전해지는 향기를 맡았다. 위스키 냄새와 더불어 홍차의 그윽한 향기는 무언가 모를 평안한 마음, 뿌듯한 마음에서 오는 여유를 주었다.
"선영아 홍차 마셔"
"고마워요."
지극히 만족한 얼굴로 입술을 쫑긋했다 다시 야물게 입술을 모았다 새침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행복하다는 말이며 그렇다고 쉽게 보지 말아요. 하는 말이었다. 여인의 독특한 방어는 익숙해지기까지 본능적으로 계속되어진다. 그것은 여인의 감성이 유리그릇과 같아서 상처를 입게 되면 감당을 못한다는 것과 쉽게 보이면 버림을 받을 수도 있다는 태생적 본능이었다.
"아유 맛있어. 약속해 줘요."
"뭐를?"
머리도 자르고 꽁지도 자르고 가운데 토막만 내 놓은 뜬금없는 약속이라는 말에 칠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다 나으면 언제나 이렇게 홍차 타 주기"
"응 그래 낫기만 해요. 몇 번씩이라도 타다 줄테니"
"약속 한 거야요. 그럼 빨리 나아야지"
켁. 쟁그러워 죽겠다. 어디에서 요런 사람이 다 나왔을까. 어이없는 표정으로 칠복은 선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자는 다 똑같은 가봐. 선영이 칠복을 빨아들일 듯한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다. 칠복은 선영의 그런 태도에 일순 당황했다. 이 표정은 추궁하는 표정이다. 말을 내지 않아도 좋지만 오해 할 수도 있으니 말을 해 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들은 말을 확인해 보고 싶다는 것이며 자신이 들은 그 말은 상당히 중요한 말이라는 뜻이다.
"여자는 다 똑같은가봐 라고 했어. 여자는 억지스런 말도 쉽게 하잖여"
"혹시 과거의 여자 생각을 하면서 저와 비교했다면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 주세요."
단호하고도 확실한 경고였다. 찔끔한 칠복은 다음 말을 낼 수가 없을 정도로 민망해졌다.
"알았슈, 내 안 그럴께"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칠복은 반쯤 남은 홍차의 팩을 들었다 놨다 했다. 선영은 칠복을 할금할금 관찰했다. 어색해졌을 때, 소원해 졌을 때 어떻게 풀어 나가는지를 확인하고 싶다. 침묵으로 나가는지 골 짓으로 나가는지 어떻게 풀어 나가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다. 아직 다음 행동이 나오지 않았다. 유머로 풀어 주면 좋겠다. 살짝 안아 준다거나 하는 가벼운 터치로 풀어 주어도 좋다. 칠복은 아직 퐁당거리고 있다. 칠복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선영아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에 대해 설명을 좀 해 줘. 내가 많이 무식하잖어"
피식 실소가 나왔다. 아차 잘 못 웃으면 비웃음으로 보일 수도 있어. 짐짓 표정을 바꾸며 앵 토라진 모습으로 갔다가 다시 칠복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충분하다. 유머 감각이 별로 없는 사람인데 생각해 보면 참 기구한 삶을 살아온 사람인데 몇 번 설명해 주어서 줄줄이 꿰고 있는 사람이 그걸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하는 것도 순발력이다. 그저 살짝 간질이거나 뺨에 뽀뽀를 해 주어도 되는 일인데 아직은 그렇게까지 못 갔나 보다. 슬며시 힘이 빠진다. 저 정도로 반응해 주었으면 이제는 내가 풀어 주어야 해.
"그건 선생님이 더 잘 알잖아요. 이리 와서 요기에 뽀뽀 한 번 해 주세요."
선영이 제 뺨에 손을 대며 말했다. 칠복은 미안한 표정으로 뺨에 뽀뽀를 하더니 살며시 안았다. 난처한 장면을 풀어 주어서 고맙다는 뜻이다.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영의 마음속에서 그것은 점점 커지고 있다. 자신의 죽을병을 함께 이겨내고 있는 사람. 헌신적이며 충직하고 정직한 사람. 선영은 자신의 심장에서 점점 커지고 있는 칠복을 자신이 평강이 되어 온달장군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짐에 따라 몸을 떨었다. 아아 언제 이 병이 나을까.
"그런데 오늘 끓여다 주신 것은 뭐예요? 잉어는 아닌 것 같고 맛이 아주 독특하고 맜있었어요."
"아 그거? 자라야 자라"
"꽥..."
"세상에 내가 별 것을 다 먹어 봐요. 아이 징그러. 자라라니..."
속이 니글거리는 모양이다. 얼른 박하사탕을 까서 입에 넣어 주었다. 쏘옥 하고 받아먹는다. 간밤에 더 큰 잉어를 잡고 싶은 마음에 주낙을 놓았었다. 여기에 냄비뚜껑만한 자라가 물린 것이다. 미끼로는 큰 개구리 뒷다리를 썼는데 커다란 자라가 그걸 한입에 삼키고는 모가지 중동에 걸려 잡히고 말았다. 힘도 억센 녀석을 잡아 올리느라 칠복이 혼쭐이 났다. 몇 번이나 물릴 뻔 했다. 주낙에 걸린 이 녀석이 하도 요동질을 쳤는지 다른 고기는 물리지 않고 달랑 자라 한 마리만 걸렸다. 힘이 장사이다. 이걸 먹으면 아무래도 병과 싸울 힘이 불끈불끈하고 생길 것만 같다. 자라는 고기가 쫄깃하고 연하기 때문에 오래 끓이면 맛이 풀어진다. 통째로 넣고 30분 정도를 삶아서 건져냈다. 잘게 고기를 손으로 찢어 불린 찹쌀을 한줌만 넣어 풀기를 더해 죽으로 쑤었다. 맛있는 양념간장을 뿌려서 먹으면 행복해지는 맛이다. 머리통과 꽁지와 발목은 칠복이 먹었다. 등껍질은 슬며시 가져다가 도베르만에게 주었다. 녀석들은 이게 웬 떡이냐는 듯 단숨에 먹어 치워 버리고 어디 더 없슈 하는 얼굴로 칠복의 손을 바라보았다. 두 마리의 도베르만은 이제 칠복을 보면 온갖 아양을 떨었다. 칠복의 손이 한 번 가면 오줌을 싸면서까지 좋아라 했다.
양념간장은 파와 부추를 잘게 썰어 넣고 마늘을 곱게 갈아 조미간장에 약간의 물을 넣어 만들었다. 그 위에 참기름을 반 수저를 넣고 후추로 향을 더해 주었다. 밥공기의 절반 택이 되도록 넉넉히 만들었다.
"그런데 요즘은 알통이 생기나 봐요. 하두 잘 먹어서 그런가..."
"알통? 그게 어디 있는데"
"어머 어머 이게 알통이야요."
삐쩍 마른 팔을 보여주며 힘을 써 보고는 수줍게 웃는다. 칠복이 눈에는 그게 그거지만 선영은 자신의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대견하다. 정성이 하늘에 통하나 보다. 하긴 요즘 선영의 행동반경이 눈에 뜨이게 넓어지고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서는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발걸음의 힘이 예전과 같지 않고 예사롭지 않다. 혹시 사람이 죽기 전에 일시적으로 좋아진다는 그런 현상은 아닐까. 칠복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생각을 털어 버렸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노라고 굳게 믿고 있는 터이다.
"침대 위에 편히 앉아요. 주물러 줄께"
"네"
이제는 팔 다리 주물러 주는 것은 별것 아닌 일상이 되어 있다. 젊은 청춘의 세포는 활발하게 움직여 주기를 원하고 있으나 근육이 없어 근력이 생기지 못하니 뼈마디가 그 일을 해야 했다. 자연히 움직이는 대로 뼈마디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어 고통을 주고 있다. 부담이 생긴 뼈마디는 주물러서 풀어 주어야 했다. 칠복은 선영의 앙상한 뼈마디를 주물러 주면서 온통 가슴이 저리고 아팠다. 그것은 슬픔이었다.
"아이 시원해. 요쪽도"
등 근육이 땅기나 보다. 등 쪽을 가리키며 요쪽도 했다. 등줄기는 울퉁불퉁 척추 뼈와 앙상한 갈비뼈로 간신히 가죽이 덮여 있는 몰골이다. 정성을 다해 눌러주고 만져주며 풀어 주는데 손길이 가는대로 휘청휘청 한다.
"엎드려 누워 봐"
"네에"
무리였다. 엎드린 자세에서 칠복의 손이 눌러주니 눌러주는 대로 기침이 나온다. 바튼 기침이었다. 어깨와 팔 그리고 종아리와 허벅지를 고루 주물러 주었다. 관절 부분은 약간 힘을 주어 꾹꾹 누르며 두 손으로 비비며 풀어 주었다. 앙상한 상체와는 달리 엉덩이는 도톰했다. 얇은 잠옷에 속옷이 다 비쳤다. 물방울무늬의 속옷을 입고 있다. 다리를 주무르는데 딱히 어디에 시선을 둘 수도 없다. 앙상한 뼈마디를 애처롭게 보다가 수연의 도톰한 엉덩이를 보니 무언가의 희망이 생겼다. 팔과 다리에 살이 붙고 하면 능히 병도 이겨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나저나 엉덩이의 갈라진 틈에 자꾸 눈길이 꽂히니 이 노릇을 어찌 하나.
"쌔근 쌔근"
온몸을 칠복에게 맡겨 놓고 선영은 잠이 들었다. 세상에 남정네가 자기 엉덩이를 할금 할금 훔쳐보고 있는데 잠이 들다니, 지금 이 판국에 어떻게 잠이 오나 그래.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잠들어 있는 선영의 입술이 복숭아 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 며칠 사이 눈에 띄듯 선영의 상태가 좋아졌다. 기침을 하는 횟수도 줄어들었고 각혈까지 하며 토해내듯 하는 악랄한 기침도 잦아들었다. 병과 싸워 이겨내고 있는 중이 아닐까. 나이는 어리지만 참 대견하구나. 언어 표현에 있어서도 야물딱스럽고 배려를 해 주는 마음도 비단결과 같이 곱다. 칠복은 잠들어 있는 선영의 허벅지를 주무르다 말고 선영의 허리를 살짝 껴안고 허리에 뺨을 댔다. 꼭 이겨내요. 첼로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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