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99 송이의 장미
31. 99송이의 장미
“부총재님 어서 오세요. 일찍 도착하셨습니다.”
당사에 도착하여 현관 계단을 오르는데 동료 김 의원이 반색을 하며 맞이한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의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 총재님 오늘 회의에서 특별한 변수는 없겠지요?”
어느새 김 의원이 옆구리에 착 달라붙어 목소리를 낮추어 오늘 회의 분위기에 대한 염려를 하고 있다. 이미 며칠 전부터 입을 맞추어 두었던 의제와 예상되는 반론들에 대한 대비책에 변수가 생긴 것은 아니냐는 염려 반 확인 반의 심중으로 불안한 듯 눈을 굴리며 묻는다.
당사의 복도는 매입형 스포트라이트로 식입하여 자연광에 가까운 빛을 비추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당사의 복도는 밤에도 대낮같이 환했다. 지금 시간이 오후 9시 를 지나고 있으니 9시 35분 에 시작 예정인 당정 정책 회의까지는 30여분이 남아 있다. 계파별로 차이가 있는 의견들을 재 취합하여 확인 조율할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은 충분하다.
박 의원은 자신의 그림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열십자로 음영을 그리고 있는 복도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발뒤꿈치로 바닥을 누르듯 부 총재실을 향하여 발걸음을 줄였다. 어느새 보좌관들과 몇몇 의원이 박 의원 주변으로 다가와 에워싸듯 포진한 채로 박 의원의 발걸음에 자신들의 발걸음을 맞추고 있다.
진한 감색 바탕에 흰색의 굵은 줄무늬가 있는 울 실크 정장은 흰색 와이셔츠에 황금색에 가까운 노란 꽃이 크게 박혀 있는 빨간색의 실크 넥타이와 어우러지며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을 주고 있다. 까만 뿔테 안경을 고집스럽게 착용하고 있는 박 의원의 얼굴은 지적으로 보였으며 약간 상기된 듯 화색이 돌았고 계란형의 얼굴이면서도 짙은 눈썹과 강한 턱 선으로 인해 결단력과 추진력이 내부에 갈무리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늘씬한 키에 쭉 뻗은 허리선과 살짝 당겨 붙인 것 같은 턱은 반듯한 인상을 주었다. 똑바로 서면 아마도 코와 배꼽 그리고 발가락이 일직선이 될 것 같은 당당한 기풍이다. 그는 언제나 발뒤꿈치로 바닥을 찍듯 걸었다. 그리하여 그의 걸음걸이는 항상 일정했는데 마치 군인이 행진을 하는 걸음걸이를 축소해 놓은 듯 보였다.
자신의 집무실 응접소파에는 이미 몇 몇 동료의원들이 박 의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서는 박 의원을 보고 일어나 반가이 인사를 한다. 박 의원은 목례로 답했다.
“부 총재님 오늘 안색이 아주 좋습니다. 멋진 저녁식사를 하신 모양입니다.”
정책위 의장을 맡고 있는 김대원 의원이다. 삼선의원으로 베테랑 정치인이다. 보수사상의 정통파로 인정을 받고 있었는데 TV의 100분 토론시간에 단골로 초대를 받는 인기스타 의원이다. 박 의원과 부총재 경선에서 미세한 표차로 떨어졌으나 당내에서는 부 총재 버금가는 존대를 받고 있었으며 막강한 인맥의 파워가 형성되어 있는 인물이다.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몸매가 당당하고 연설을 하는 틀과 인상이 과거 박정희 대통령과 비슷한 인상을 주었다.
"고맙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박 의원은 집무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아서 평소의 버릇대로 책상 위에 올려 있는 서류를 검토해 보았다. 쪽지 몇이 서류 속에 감추어져 있다. 총재로부터 온 쪽지에는 오늘 의사결정에 있을 표 단속과 반대파의 반론에 대한 경계를 당부하고 있다. 다음 쪽지는 지금 막 응접소파에 앉은 정책위의장인 김대원 의원의 쪽지였다. 내용은 계보의 흐름과 계파와 계층 간의 갈등이 다소 예상되니 안심하지 말고 총재의 명을 잘 관철할 수 있도록 충실해 달라는 당부이다. 예상되는 반대의견을 낼만한 이름이 몇 쓰여 있다.
책상 위에는 99송이의 붉은 장미가 이슬을 머금은 채로 마치 화원에서 지금 막 옮겨진 듯 생동감이 넘치는 자태로 백색 도자기 화대에 꽃꽂이 되어 있다.
“사모님이 보내신 장미인데 너무 싱싱해요. 의원님”
커피 한 잔을 책상 위에 놓으며 정란이 미소를 지으며 꽃을 보낸 분의 정성에 탄복했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다.
아내가 보냈다는 말을 들으니 과연 그 사람이야 하며 미소를 짓고 난 뒤에 슬쩍 눈으로 장미꽃의 송이 수를 헤아려 보고 박 의원의 표정은 일순 굳어졌다. 99송이의 장미.
99가지만 잘하라는 뜻이다. 99번 잘하고 1번 잘 못 하면 잘했던 99가지의 잘한 것이 무위로 돌아간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왔던 박 의원이 아내를 만나고 난 뒤에 삶의 철학까지도 바뀌었다. 99송이의 장미. 박 의원은 잠시 회상에 빠져 들어갔다.
*
박 의원이 치열한 선거전에서 승리를 하고 금배지를 달고 돌아 온 날, 아내는 꽃꽂이 장식으로 축하해 주었다. 99송이의 장미를 흐드러지게 펼쳤고 주변을 아스파라가스로 데코레이션하고 중앙에는 한껏 키를 낮춘 한 송이의 백합을 꽂았다.
“여보 축하드려요”
덥석 안기며 kiss를 하며 촉촉한 눈으로 축하를 해 주는 아내를 품에 안고 박 의원은 벌써 폐부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내음을 콧속 점막으로 느끼고 있다. 그것은 박 의원이 최고의 감동을 받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박 의원은 아내 선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 덕분이야, 당신 덕분이야”
선영은 칠복의 가슴에 안겨 잠시 흐느꼈다. 깊고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언제나 감동을 주는 사람. 늘 가슴이 저리도록 행복감을 주는 사람. 가슴에 안겨 있으면 언제나 떨림이 있는 사람. 눈만 마주쳐도 언제나 수연의 가슴이 뛰고 얼굴에 홍조가 일어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나이 차이가 있어도 선영에게 있어서 칠복은 항상 젖줄이 싱싱한 남자였다. 선영은 아침에 눈을 뜨는 시간이 제일 행복했다. 눈을 떠서 거실의 드리워진 커튼을 젖히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날 때 마다 습관적으로 칠복의 얼굴을 이윽히 바라보면 어느새 가슴 속에서는 행복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다. 선영은 그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가끔 혹시나 이 행복이 깨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조바심까지 생겨 더욱 절실하게 감사기도를 했던 것이 이제는 일상화 되어 습관으로 굳어졌다.
“여보 장미가 99송이인데 아무래도 깊은 뜻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보입니다. 그래 어떤 의미가 있는 숫자인겨?”
“눈치 채셨군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호호호”
아내의 청량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윽한 눈빛으로 칠복은 다음 말을 재촉했다.
“99가지만 잘하시라는 뜻이어요.”
“어라 그럼 한 가지는 잘 못 해도 된다는 뜻이요?”
“그 한 가지는 순결한 중심을 잃지 말라는 뜻이구요.”
“으으음, 잘 알겠어요. 당신의 메시지를 각골명심 할께요.”
민초를 위해서 99가지를 잘 하고, 자신이 잘 한 것에 대하여는 키를 낮추고 오직 자신의 중심을 순결하게 지켜 달라는 선영의 메시지가 뼈 속 깊이 전달되어 왔다. 일일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99송이의 무리 속에 한껏 키를 낮추고 있는 한 송이의 백합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밤에 수연은 칠복의 가슴에 99송이의 불꽃을 선물했고 칠복은 한 송이의 백합으로 화답했다.
"여보 우리 와인 한 잔 할까?"
"잠이 안 오시나 보군요. 좋아요. 왈츠도 춰요 우리"
"그럽시다. 탱고도 한 곡 추자구"
"고마워요. 탱고 한 곡 추고 싶었는데 어쩜..."
부부는 거실 바에 마주 앉아 와인을 기울였다. 마주 보고만 있어도 꿈결같은 굄이 흘렀다. 마치 자석과 같이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마력은 서로가 서로에게 깊이 빠져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만난 사람인가. 기가 막히게 만난 사람이다. 어쩌다가 만나게 되었던가. 기적처럼 만나게 된 사람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이 마주쳤을 때 천지가 불끈하고 움직이는 청천벽력과 같은 느낌을 서로가 심장을 통해 느꼈었다.
두 사람이 첫 와인 잔을 나눈 것은 L.A에서 였다. 아버지 박 사장은 정계에 진출하여 여당 국회의원이 되었던 때였다. 이런 저런 소문이 나면 좋을 것이 없었다. 더구나 폐병쟁이 딸에 칠뜨기와 같은 사위를 보았다는 소문이 나는 날에는 정적들에 의해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 뻔했다. 선영의 어머니가 그래도 곁에 두자고 애걸했으나 사람이 죽고 사는 정치판에서 자식 문제로 인해 공격을 받는다면 그 충격이 얼마나 클 것인지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애걸을 하면서도 뒷심이 없는 애걸이었다. 박 의원은 칠복에게 선영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10년 내 미국 박사학위를 따낼 것을 요구했다. 두 사람을 함께 미국으로 유학시켜 주는 대신 반드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라는 조건이었다. 만약 박사 학위를 받지 못한다면 귀국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사실 칠복을 처음 만난 박 사장은 칠복의 추레한 모습에 치를 떨었다. 험하게 살아온 36살 나이에 고개가 흔들려졌다. 천애 고아에다 독학으로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을 했다는 점도 고개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겨우 논 몇 마지기를 농사지으며 농번기에는 노동이나 하고 지내는 처지란다. 더구나 머슴 시절 섬겼던 주인 가족의 묘지기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구역질까지 할 뻔 했다. 그 때 선영의 나이 24살, 칠복이 나이 36살이었다.
*
잠시 눈을 감고 회상에 잠겨 있던 박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로 나왔다. 응접실 탁자 위에는 몇 가지의 서류와 메모가 끼워져 있었다. 이를 검토하고 정책위의장인 김대원 의원과 법사위의장인 이인구 의원 그리고 국방위의장 정일 의원에게 시선을 보내며 재차 확인했다.
"변동 사항은 없겠지요?"
"아마 없을 겁니다. 이번에 변동사항이 있으면 큰 일 납니다."
"대체 대통령은 왜 전작권을 미국에게 넘겨 주겠다는지 속을 모르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나토에서는 미국이 영원토록 의장국이 되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있다는데 말이지요."
"그야 미국이 나토의장국이니 돈을 펑펑 낼 수밖에 없는 처지이고 미국이 돈을 내놔서 나토가 쾅쾅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어쨋든 미국은 책임감이 강해서 지휘권을 쥐고 있는 동안은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어쩔 수 없이 받아주고 있지요. 그걸 내놓으라고 하니 대체 대통령이 제정신이냐 고" 국방위원장인 정일 의원이 격양된 어조로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폭폭한 모양이다.
"부 총재님. 이 문제는 대통령과 여당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 버려두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미국과의 동맹이 예전 같지 않으니 미국 측에서 자꾸 분담금 인상을 들고 나오는데... 문제가 심각합니다."
"변동사항이 없으면 가십시다."
박 의원이 결연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의총회관으로 향했다. 박 의원 일행이 문을 열고 나오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의 카메라에서 프레쉬가 섬광을 발하며 셔터 소리가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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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80회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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